식품유통과 AI
요즘 식품유통업계에 유행인 마케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AI) 마케팅'입니다. 지난해 글로벌 AI시장 규모는 1650억 달러(약 227조원)였는데요. 2030년엔 10배인 1조5910억 달러(약 2200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입니다.
그런 만큼 식품유통업계에서도 AI를 어떻게든 활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식품과 유통이라니, AI와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산업군인데요. 그럼에도 AI를 연계한 마케팅은 꾸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몇 개 들어보겠습니다. 지난달 말 배스킨라빈스는 8월 이달의 맛 '트로피컬 썸머 플레이'를 선보였는데요. 상품 기획 단계부터 구글의 최신 인공지능 '제미나이(Gemini)'를 활용해 개발했다고 합니다. 구글플레이의 4가지 로고 컬러에 어울리는 원료를 질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또 여름 시즌 인기 검색 키워드를 반영해 구글플레이 로고 컬러의 비주얼과 원료 구성을 제안받아 만든 맛이라는 설명입니다.
저가 피자 시장의 선두 주자인 고피자도 AI를 적극 활용 중입니다. 고피자는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사용해 사진 속 객체를 자동으로 식별하는 AI 이미지 인식 기술을 사용한 'AI 스마트 토핑 테이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밝혔습니다. 카메라를 통해 도우 위의 소스·치즈·토핑의 양을 실시간으로 파악한다고 합니다.
가정간편식 밀키트 업체인 프레시지도 AI를 활용해 신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달 떡볶이 밀키트 5종을 선보였는데요. 자체 AI시스템을 통해 일 600만개의 제품을 분석하고 15억개의 누적 데이터를 활용해 제품 개발을 진행했다고 하네요.
이밖에도 AI를 활용해 신제품을 내놓는 기업들은 많습니다. GS25는 업스테이지의 인공지능 챗봇인 '아숙업'과의 대화를 통해 하이볼 신제품을 내놨습니다. '세계최초'라는 말도 덧붙였죠. SPC삼립의 샐러드 브랜드 '피그인더가든'도 챗GPT를 활용한 샐러드 신제품을 내놨습니다.
이게…다야?
기업들의 이야기만 들으면 벌써 이 업계에서도 이미 AI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AI가 트렌드를 파악하고, 적절한 재료를 추천하고, 어떤 이름을 붙일지 결정해서 잘 팔릴 제품을 만들어 준다니 마치 어린 시절 SF영화에서 봤던 미래세계가 현실에 된 기분입니다.
하지만 정작 AI로 신제품을 만든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음에도, 막상 어떻게 만드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AI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 걸까요. AI는 어떤 선견지명이 있어서 기가 막힌 신제품을 뽑아내는 걸까요. 그래서 기업들이 AI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답변은 '빨간약'을 먹은 기분이었습니다.
실제로 A기업의 경우 신제품을 만들면서 AI의 의견을 물은 건 '편의점에 자주 가는 MZ세대가 좋아하는 샐러드는?', 'MZ세대가 좋아하는 샐러드 토핑은?' 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AI의 대답은 "단백질 토핑, 퀴노아·오트밀 등 곡물 샐러드. 닭가슴살·메추리알·새우 토핑"이었습니다.
하나 더 볼까요. B기업은 하이볼을 개발하면서 '맛있는 하이볼 레시피를 알려줘', '캔의 디자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결과물은 "레몬을 넣은 오크향이 나는 위스키 하이볼"이었습니다.
내친김에 예시를 하나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C기업은 AI에게 4가지 색을 제안하고 여름 시즌에 맞는 원재료를 골라 달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AI는 "망고·오렌지·사과·패션 후르츠"를 추천했죠. 어떤가요. 최첨단 AI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머신러닝 기술을 이용한 날카로운 질문으로 보이시나요?
뒤에 사람 있어요
사실 업계의 AI 마케팅은 'AI를 활용했으니 알리자'보다는 '알리기 위해 AI를 써먹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사람보다 빠른 AI의 빅데이터 활용이 제품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 용도는 되겠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소개드린 질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시엔 몇 가지만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수백개 이상의 질문을 하며 입맛에 맞는 답변을 선택했겠죠. 그 수많은 질문과 답변에 대한 취사선택 역시 '사람'이 합니다.
AI를 꼭 저렇게 단순하게 활용해야만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증권업계에서는 투자자의 성향 분석부터 맞춤형 포트폴리오 제안, 실제 자산 운용과 위험 관리까지 AI가 맡는 로보어드바이저 개발이 한창입니다. 인간이 운용할 때보다 수익률이 높다는 설명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까지 업계의 AI 활용은 '사람보다 검색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 준다'는 1차원적 활용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며 "마케팅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 업무에서는 참고 사항 정도로 반영되는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AI가 제안을 하더라도 그 제안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건 사람입니다. 'AI가 만든 신제품'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노력이 잊혀지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디 기업들이 AI의 매력에 빠진 나머지 그 뒤에 땀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