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광고]는 우리나라 식품유통업계의 광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광고들을 소개하고 그 뒷 이야기들을 펼쳐보는 콘텐츠입니다. 꼴찌 브랜드를 단숨에 1위로 만든 '최고의 광고'부터 잘 나가던 브랜드의 몰락을 불러온 '최악의 광고'까지, '광고의 정석'부터 '광고계의 이단아'까지. 우리의 인상에 남았던 여러 광고 이야기를 나눠 볼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추억의 광고는 뭔가요? 혹시 이 광고 아닌가요.[편집자]
매울 신
"사나이 대장부가 울긴 왜 울어" 두 명의 남성이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코미디언 구봉서가 외친다. 이 남성들은 '어우 매워' 하는 말과 함께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훔치고 있다. 구봉서는 "울 땐 울더라도"라며 이들 사이에 앉아 함께 라면을 맛보곤 잠시 후 "아이고 매워"라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더니 새빨간 봉지를 들고 위트 있게 한마디 덧붙인다. "신라면이 날 울렸어."
올해로 출시 40주년을 맞은 신라면의 1986년 첫 광고입니다. 그간 농심의 다른 라면 광고에 출연했던 구봉서와 배우 강부자가 또 함께 등장하는 광고였습니다. 구봉서는 신라면의 매운 맛을 보여주고 강부자는 중간중간 나타나 '농심 신라면'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광고는 강인한 사나이조차 눈물 흘릴 정도로 맵다는 메시지를 해학적으로 담아낸 게 특징인데요. 당시는 강인함이 남성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사나이조차 울릴 정도'라는 표현으로 신라면의 강렬한 매운 맛을 각인시킨 겁니다. 이후 광고에서는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광고 카피로 구체화 됐죠.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 만한 이 카피는 농심 창업주인 고(故) 신춘호 선대 회장이 직접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면은 국내 최초의 '매운 맛 라면'이라고 불립니다. 신라면이 출시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라면은 담백하고 깔끔한 국물을 내세우는 제품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일본 인스턴트 라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업계에선 '매운 라면은 통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었죠.
그런데 농심이 '매운 맛'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라면인 신라면을 내놓으면서 이 상식을 뒤집었습니다. 신라면의 스프는 청양고추와 마늘, 양파를 배합해 그때까지 나온 어떤 라면보다 얼큰한 맛이 났죠. 제품명도 매운 맛을 강조했습니다. 신라면의 신은 매울 신(辛)을 뜻합니다. 포장도 도발적이었습니다. 새빨간 바탕에 검은색을 더해 매운 맛을 시각화했죠.
신라면은 매운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출시 직후 세 달간 30억원어치가 팔렸는데요. 당시 라면 가격을 고려하면 무려 1500만개가 팔려나갔다는 뜻입니다. 신라면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1991년 마침내 국내 라면 시장 1위에 올랐습니다. 34년간 이 자리를 단 한 번도 내주지 않았죠.
사나이에서 세계로
사나이를 강조하긴 했지만 신라면 초기 광고에서는 강부자, 양미경 같은 여성 배우들도 함께 등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기 광고에서는 가족의 이미지가 반복됐는데요. 아버지가 신라면을 먹는 걸 본 아들이 "신라면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 후 자기도 한 그릇 먹으면서 "나도 사나이"라고 외치는 식이었죠. 여성 모델들은 주로 가족들에게 신라면을 끓여주며 가족이 함께 즐기는 라면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습니다.
이후에는 남성 모델이 더 주축이 됐습니다. 최수종, 송일국, 하정우 같은 당대 최고 인기 배우들이 신라면을 터프하게 먹는 모습을 보여줬죠. 박지성, 이용대 같은 인기 스포츠 스타도 등장했고요. 2013년엔 당시 인기 예능이었던 '진짜 사나이' 출연자들이 군복을 입고 등장해 훈련장에서 신라면을 먹기도 했습니다. 강인한 남성도 즐기는 매운 라면이라는 이미지를 계속 강화한 셈입니다
사나이를 울리는 신라면의 이미지는 해외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중국에서 신라면을 처음 출시했을 당시의 광고가 대표적인데요. 이 광고에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라는 카피가 사용됐습니다.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었다고 하네요.
30년 넘게 계속 이어지던 이 '사나이' 코드에 2019년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나이를 울린다는 표현 대신 '세계를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카피가 등장하면서인데요. 당시 광고에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손흥민이 모델로 나섰습니다. 신라면이 이미 100개국 이상에 진출한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는 점을 손흥민과 함께 전달하는 광고였습니다.
1등 매운 맛 라면의 변신
농심은 세계를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카피를 내세운 후에도 기존 카피를 함께 사용했는데요. 마침내 2024년 1월, 신라면 출시 38년만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신라면 광고에서 '사나이'를 울린다는 표현 대신 '인생을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카피가 등장한 겁니다. 성 평등 시대로의 변화를 반영한 결정이었죠.
새 광고는 스타 대신 일반인을 내세웠습니다. 가족, 친구, 동료와 신라면을 먹는 평범한 일상을 담았습니다. 사나이조차 울릴 정도로 매운 맛인 라면이 아니라,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의 신라면을 보여주는 광고였습니다. 이런 광고가 가능했던 건 신라면이 40년 가까이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인생을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카피는 현재도 신라면의 국내 슬로건으로 사용 중입니다.
신라면은 올해 출시 40주년을 맞아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글로벌 앰배서더를 뽑았습니다. 인기 걸그룹 '에스파'인데요. 그 동안 사나이를 울리던 신라면이 이제는 걸그룹 모델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에스파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한국인을 울리던 매운 맛이 이제 세계를 향하게 된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신라면이 울리는 건 한국의 사나이만이 아니게 된 겁니다.
지난 40년간 신라면은 구봉서부터 에스파까지 많은 모델이 거쳐가며 사나이를, 세계를, 인생을 울렸는데요. 그래도 40년간 변하지 않은 건 신라면이 여전히 매운 맛으로 한국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