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레고랜드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이후 급격한 자금시장 경색에 한국은행도 나섰다. 은행이 한은에서 대출받거나 차액결제 거래를 할 때 맡겨놓는 담보 증권 대상에 은행과 공공기관이 발행한 채권(은행채·공공기관채) 등을 추가한 것이다.
한은은 자금난을 겪는 증권사 등에도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약 6조원의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다.
다만 시장이 기대했던 저신용등급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매입기구인 SPV(기업유동성지원기구)를 설립, 비은행 금융 특별대출 등의 고강도 조치는 담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는 엇갈린다.
은행채 담보로 받아주고 RP 6조 사들인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27일 열린 비통방 회의에서 은행 적격담보증권 대상을 은행채와 9개 공공기관이 발행한 채권까지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9개 기관은 △한국전력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국가철도공단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한국가스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철도공사 △예금보험공사 등이다. 확대 기간은 내달 1일부터 3개월간이다.
한은은 은행간 차액결제를 개별 은행 대신 먼저 해주고 나중에 돌려받는 역할을 한다. 또 은행에 금융중개지원대출도 해준다. 이때 담보(적격담보증권)를 받아 두는데 이 대상을 늘린 것이다.
한은은 "시중은행이 은행채 등으로 담보를 납입함으로써 확보하게 되는 국채, 통화안정채권 등을 통해 유동성 규제비율(LCR) 준수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며 "향후 장외외환파생거래 증거금 추가 납입 등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국내 은행들이 활용할 수 있는 추가 고유동성자산 확보 가능 규모가 최대 29조원 정도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은은 이와 함께 차익결제이행용 적격담보증권의 비율을 내년 2월부터 기존 70%에서 80%로 높이는 계획도 석달 유예했다. 은행이 차익결제 담보로 한은에 맡기는 각종 채권 비율이 내년 2월 높아지는데, 5월까지는 현재 상태를 유지해도 된다는 뜻이다. 한은은 이를 통해 은행권이 7조5000억원의 유동성 여력을 확보할 것으로 봤다.
한은은 증권사·증권금융 등을 대상으로 RP도 약 6조원 규모로 매입하기로 했다. RP 매입은 통상 '통화정책 완화' 수단으로 쓰이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증권사 자금난 해소를 위해 이 조치를 선택했다.
12월 금통위 스텝 영향은?
다만 시장이나 금융권에서 기대한 강도 높은 유동성 대량 공급 방안인 SPV의 재가동이나 금융안정특별대출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관련기사: [레고랜드 금융대란]④시장은 '연말 공포'…한은도 골머리*(10월26일)
앞서 지난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은이 비은행 금융 대출(특별대출)을 시행하고 SPV를 재가동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채권시장안정펀드는 한계가 있을 수 있고 이는 한국은행도 알고 있다"라며 "한은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할 것으로 이해한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SPV나 특별대출을 이번 조치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물가 압력으로 인한 긴축 기조를 흐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이번 조치 중에도 6조원 규모 RP 매입을 '일시적 유동성 위축 완화 목적'이라고 못박았다.
한은은 "공급된 유동성은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다시 흡수되기 때문에 추가 유동성 공급 효과가 거의 없다"며 "현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고랜드발 금융시장 불안 탓에 향후 통화당국의 긴축 강도나 속도도 조정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내달 있을 올해 마지막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만 인상하거나 동결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달 12일 열린 금통위에서는 사상 두번째로 기준금리를 한번에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이 있었다. 이는 최초의 5회 연속(4·5·7·8·10월) 인상이었다. 하지만 현재 미국 정책금리가 0.25%포인트 높은 한미 금리역전 상태인 데다, 내달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다시 한번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금리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배경탓에 한은도 연말 또 다시 빅스텝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의 금융시장 상황이나 이번 조치를 감안하면 보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예상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박소연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한은 조치 후 국고채, 통안채 등이 4~6bp(1bp=0.01%포인트) 하락하고 있다"며 "시장은 한은이 금리인상을 더 고집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는 듯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