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처럼 법원 판결서를 인터넷으로 모두 열람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정부가 대국민 데이터 개방 차원에서 2000년대 이전의 형사·민사 판결문의 개방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 사건의 과거 판결을 인터넷으로 쉽게 확인하게 되면 불필요한 소송이 줄어들고 법률 서비스의 품질이 보다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28일 오후 '법원 판결서의 인터넷 열람·제공 제도 개선 제언' 안건을 외교부 국제회의에 상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정부의 국민 알권리를 위한 데이터댐 개방 추진 사업 차원의 일환이다.
옛날 판결서도 인터넷 공짜 열람
제언이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 통과되면 인터넷을 통한 판결서 열람 범위가 확대된다. 지금도 법원 사이트에서 사건번호 등을 입력해 판결서를 열람할 수 있다.
다만 공개 범위가 확정 판결만으로 제한돼 있다. 확정 판결이란 대법원 판결이나, 1·2심 판결 중 상소기간이 만료돼 불복할 수 없는 판결을 뜻한다.
확정판결 중에 형사는 2013년 이후, 민사는 2015년 이후 판결서만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미확정 판결은 형사는 비공개, 민사는 작년 12월 민사소송법 개정에 따라 2023년 이후 판결서만 점차 공개될 예정이다.
위원회는 확정 판결은 형사는 2013년 이전, 민사는 2015년 이전 판결서도 공개하도록 개선안을 마련했다. 미확정 판결의 경우 형사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공개 방안을 마련하고, 민사는 2023년 이전 판결서도 공개 범위에 소급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형사사건의 미확정 판결은 공개 여부를 두고 법조계의 찬반 양론이 팽팽한 상태다. 판결서상 비실명처리를 거치더라도 사건관계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에 위원회는 비실명처리 이상의 기술적 개인정보 보호장치를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가독성 높이기도 주요 과제다. 현재 판결서를 법원 사이트에서 내려받으면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이름, 기업명 등이 알파벳으로 전환 표기돼 나온다. 알파벳이 지나치게 많다보니 기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이미지 PDF 파일로만 다운로드 돼 산업·학문적으로 재가공이 어렵다. 판결서 한건당 열람수수료(1000원)도 받고 있다. 위원회는 판결서 제공 방식을 오픈 API 등으로 바꾸고 열람 수수료를 폐지, 무료 서비스로 운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법률 서비스에도 AI 더한다
현재 영국과 미국의 경우 판결서는 물론 소송기록까지 인터넷에 전면 공개하는 전향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비실명처리조차 진행하지 않기 때문에 프라이버시 공개를 꺼려하는 관계자들이 '합의'를 택하는 추세가 짙다. 독일과 프랑스는 판결서를 비실명처리한 뒤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판결서 데이터 공개 범위가 늘어난다면 국내 법률 서비스도 선진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작게는 유사 사건 판결서 확인을 위해 법조인들이 들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유사 사건 판결서를 보고 소 제기를 포기하면서 불필요한 비용을 아낄 수도 있다.
크게는 국민에 의해 사법부가 견제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기에 사법의 투명성 및 공정성이 제고될 것으로 기대된다. AI(인공지능)를 법률 서비스에 접목시키는 '리걸테크'의 고도화 기회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판결서는 국내 핵심 미개방 데이터로 2000년대 초반부터 제도 개선 요구가 나왔다. 다만 사법부는 개인정보 침해 이슈 탓에 인터넷 전면 개방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위원회가 '제언' 형식으로 제도 개선안을 마련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위원회 관계자는 "판결서 데이터 개방은 3권 분립에 따른 사법부 소관으로 사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며 "위원회가 정책 방향을 일방적으로 만들기엔 한계가 있어 제언 형식을 택했으며 앞으로 설득의 작업을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