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의 경영 승계구도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미약품그룹 창업주인 고(故) 임성기 전 회장과 부인 송영숙 현 회장의 장남인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자리에서 물러날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회사는 송 회장의 책임경영을 위한 단독경영 체제로 전환한다는 입장이지만 임 대표는 해임에 동의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장녀인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과 차남 임종훈 사장 등 삼남매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가 오는 24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 임종윤 대표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을 예정이다. 임 대표가 물러나면 공동대표 체제였던 한미사이언스는 송 회장 단독대표로 전환된다.
임 대표는 버클리음대를 졸업하고 2000년 한미약품 전략팀 과장으로 입사한 후 북경한미약품을 거쳐 2009년 한미약품 사장, 2010년에는 한미사이언스(당시 한미홀딩스)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차기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지분율로 봤을 때 임 전 회장이 임 대표를 후계자로 내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한미약품은 지난 2011년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를 설립, 인적분할했다. 오너일가 경영 되물림을 해 온 다수 제약기업들은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녀들의 지분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경영승계를 준비해왔지만 한미약품의 경우 지주사 전환 당시 자녀들에게 지분을 거의 이전하지 않았다.
현재 한미사이언스의 지분율을 봐도 그렇다. 송 회장의 지분율이 11.65%로 가장 높고 다음으로 임주현 사장 8.82%, 임종훈 사장 8.41%였다. 정작 임 대표의 지분율은 지난해 8.94%로 임 두 사장과 비슷했지만 최근 상속세 마련 등을 이유로 일부 지분을 처분하면서 현재는 7.88%로 가장 낮다.
특히 송 회장은 지난해 임원인사에서 임주현 사장과 임종훈 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삼남매가 모두 사장직에 올라있는 상태다. 임종훈 사장이 한미헬스케어 대표이사를 겸임하고 있긴 하지만 한미헬스케어 지분율 역시 임종훈 사장이 37.85%, 임종윤 대표가 35.86%, 임주현 사장이 24.18%로 삼남매 모두 큰 차이는 없다. 이번 임 대표의 해임으로 장자 승계가 아닌 세 남매 모두 가업승계 시험대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임 대표가 물러난 후 행보도 주목된다. 임 대표 최측근에 따르면 그는 스타트업 '코리컴퍼니' 경영에 집중하거나 한미약품 사장으로 실무에 나서 경영 능력을 입증하거나 두 가지 갈림길에서 고민 중이다. 코리 컴퍼니는 임 대표가 2007년 홍콩에 설립한 회사로, 연구와 벤처투자, 신사업 인큐베이션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코리컴퍼니에 집중할 경우 승계구도에서 멀어지고, 한미약품 사장으로 입지 확대에 나설 경우 삼남매간 경영 및 소유권 분쟁이 예상된다.
임 대표 최측근은 "임종윤 대표가 아직 사임서 제출하지 않았고 해임에도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라면서 "임 대표가 운영 중인 스타트업에 집중할지, 한미약품 실무로 돌아와 사업재편 및 구조조정 등을 진행할지 아직 고민 중에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미약품은 이번 임 대표의 해임이 경영권 분쟁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미사이언스의 ESG경영 및 책임경영 실현을 위해 송 회장의 단독경영 체제로 전환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회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에 신규 선임된 장녀 임주현 사장도 곧 자진 사임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약품그룹의 후계자 구도가 불확실한 상황이 되는 셈이다. 만약 경영권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소유권은 오너일가 삼남매가 균등하게 유지할 경우 평화롭게 경영을 이어갈 수 있게 되겠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이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 직위를 유지하면서 책임경영을 구현하기 위한 방안"이라며 "송 회장이 주요 의사결정을 하고 일상 경영현안은 기존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임종윤·주현·종훈 3인 사장은 변동없이 그동안 해오던 업무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