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어급들로 평가받는 기업들이 잇달아 상장 철회 결정을 내리면서 증권사들도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기업공개(IPO) 시장 호황을 타고 투자은행(IB) 부문 금맥 역할을 한 주식발행시장(ECM)에서의 실적 악화가 불가피하게 됐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당분간 IPO시장의 한파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금리 상승 구간에서 후한 기업 가치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상장을 중도 포기하거나 공모 규모가 축소될 수 있어서다. 가뜩이나 힘겹게 1분기를 마무리한 증권사들의 고단한 행보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IPO 초호황기, 증권사들 어땠나
16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및 외국계 증권사들이 주관한 공모 규모는 34조1000억원 수준이다. 2020년 8조1500억원보다 무려 4배 이상 증가했다. 신규 상장 기업들의 공모가를 기준으로 한 시가총액(코스피+코스닥)도 103조원으로 지난해 22조원 대비 5배 가량 급증했다.
대어급, 준척급 가릴 것 없이 다수의 기업들의 시장 입성이 늘어난 영향이다. 지난해 1분기 유가증권시장에 입성한 SK바이오사이언스를 시작으로 2분기에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 3분기 카카오뱅크, 크래프톤, 현대중공업, 4분기 카카오페이까지 시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기업들이 릴레이 상장이 계속됐다.
코스닥시장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코스닥시장의 문턱을 넘은 기업은 99개사다. 이는 2015년 102개사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확정 공모가 대비 시총도 17조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상장을 주관한 증권사들도 보수를 챙겼다. 지난해 자본시장으로부터 4조3000억원을 조달받은 크래프톤의 경우 대표주관을 맡은 미래에셋증권이 받은 인수 수수료만 54억원에 달한다. 큼지막한 주관 한 번에 수십 건의 코스닥 기업 주관 계약을 맡은 효과를 본 셈이다.
IPO시장이 점차 과열되면서 대형 증권사들간 주관 경쟁도 한층 치열하게 전개됐다. 지난해 미래에셋증권이 주관한 공모 총액은 9조원에 육박한다. 결과적으로 공모규모 1조원을 넘어서는 초대어급 기업 3개사(SK아이이테크놀로지, 현대중공업, 크래프톤)를 잡으면서 실적 면에서 경쟁사들을 따돌렸다.
그 뒤를 4조3000억원 가량의 공모 주관 실적을 올린 JP모건이 이었고, 3조8000억원의 한국투자증권이 3위 자리에 올랐다. 2020년 빅히트(현 하이브)와 SK바이오팜을 품으며 주관 실적 1위에 올랐던 NH투자증권은 지난해 4위로 밀렸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작년에는 시중에 풀린 풍부한 유동성 때문에 IPO를 하면 수요예측 및 청약 경쟁률이 높게 나왔다"며 "공모가 또한 밴드 상단 또는 이를 초과해서 확정되는 경우도 많아 시장 상황 자체가 증권사들에게 우호적으로 조성됐다"고 평가했다.
올해 고난의 행군 이어진다
IPO 시장의 호황은 짧게 끝났다. 통화 정책의 영향으로 국내외 주식시장의 조정 국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장 계획을 접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연초 현대엔지니어링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에는 SK쉴더스, 원스토어까지 대어로 평가 받는 기업들이 완주를 포기했다. 올해만 벌써 6개 기업이 중도 하차했다. 상장을 강행한다고 하더라도 공모가가 밴드 하단 내지 하단 이하에서 확정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현재까지 공모가 하단 또는 그 이하에서 공모가가 확정된 기업은 애드바이오텍, 나래나노텍, 인카금융서비스 등을 포함해 9개사다. 지난해 전체 집계된 11개사에 이미 육박하고 있다.
시장 상황이 악화되면서 부진한 공모가를 받아드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상장을 철회하거나 공모가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면서 증권사 ECM 실적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공모 규모에 비례해 증권사들의 보수가 책정되기 때문이다. 공모가가 하향될수록 증권사들이 가져가는 돈은 줄어든다.
다만 수치만 봤을 때 시장 상황을 체감하기는 힘들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증권사들이 주관한 공모 규모는 26조원 규모로 지난해 34조원에 3분의 2 수준이다. 국내 IPO 시장 역사 상 최대어인 LG에너지솔루션이 지난 1월 상장하면서 12조7500억원을 조달받은 탓이다.
향후 시장 상황도 녹록지 않다. 현재로서는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인해 분위기 전환에 걸리는 시간을 예측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올해 하반기 후반부나 돼야 유의미한 전망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 증권사들이 ECM 실적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견해를 내놨다. 전 사업 영역에 걸쳐 실적이 악화하고 있는 데 그중 일부인 주관 실적만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는 "증권사들마다 주력 사업은 다르지만 일단 주식시장의 일평균 거래대금이 현저하게 줄면서 리테일 업황이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다"며 "여기에 증권사들의 채권 평가손익까지 악화하면서 실적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려운 시기에 ECM이 힘을 보태주면 좋겠지만 IPO 시장이 침체된 탓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며 "지금은 상장 주관 실적뿐 아니라 전체적인 실적 관리가 필요한 상황"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