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저녁 이런 소식을 알리는 건 테러입니다. 물론 기자의 숙명이기는 하지만 상도의(商道義)라는 것이 있는데 말이죠. 코로나19로 예년과 같은 설날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느긋한 저녁을 보내고 있던 지난 12일. 느닷없이 울린 휴대폰 문자 메시지에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쿠팡의 미국 증시 노크 소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는 뉴스를 접하면 반응합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뉴스를 확인하고 추가 취재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단 자신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작용합니다. 일단 가치 없는 일로 치부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요. 저는 후자였습니다. 사실 쿠팡의 미국 증시 상장 추진 소식은 구문(舊聞)이기도 했거든요.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지난 2011년 "미국 나스닥에 상장해 세계로 도약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저도 이미 쿠팡이 나스닥 상장 준비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여러 번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자를 본 순간 '쿠팡 나스닥 상장이 하루 이틀 된 이야기도 아닌데 무슨'이라며 의미를 애써 무시했습니다. 사실 이제야 실토하지만, 설날 저녁에 소식을 전한 쿠팡이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했습니다. 쿠팡이 보낸 문자에서 낯선 단어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NYSE'였습니다. 그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나스닥'이 아니라 'NYSE'였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쿠팡=나스닥 상장'이라는 공식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도 나스닥 상장과 NYSE 상장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들도 혼란스러웠나 봅니다. 곳곳에서 제목을 '나스닥 상장'으로 꼽았더군요.
그렇다면 쿠팡은 왜 배신(?)을 한 것일까요? 쿠팡의 배신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NYSE와 나스닥의 차이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일 듯 싶습니다. 그 차이점을 살펴보다 보면 쿠팡이 왜 나스닥이 아닌 NYSE로 갔는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더불어 쿠팡이 NYSE에 상장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 있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짚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미국 주식 거래소는 크게 세 군데로 나뉩니다. 가장 역사가 긴 곳이 바로 이번에 쿠팡이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뉴욕증권거래소(NYSE·New York Stock Exchange)입니다. 1792년에 설립된 거래소로 가끔 영화나 뉴스에서 보면 마치 경매하듯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며 종이를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그 거래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NYSE는 역사가 오랜 만큼 상장된 기업들도 대부분 정통 산업을 비즈니스 모델로 하는 곳들입니다. 제너럴모터스(GM), 제너럴일렉트릭(GE), 포드, 보잉, 맥도날드, 코카콜라 등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정통 산업을 영위하고 있는 곳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버(Uber)나 화이자(Pfizer) 같은 기업들도 NYSE에 상장돼있습니다. 상장 조건이 까다롭고 그만큼 기준도 엄격합니다. 상장 및 유지 비용도 많이 듭니다.
그다음은 나스닥(NASDAQ·National Association of Securities Dealers Automated Quotations)입니다. 나스닥은 1971년에 개장했습니다. NYSE처럼 사람이 직접 주식 매매를 하는 곳이 아니라 시작부터 자동거래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애플, 페이스북, 구글, 테슬라 등 주로 테크, 바이오, 헬스케어 기업들이 상장돼있습니다. 쿠팡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아마존도 나스닥에 상장돼있습니다.
NYSE에 비해 상장 기준이나 유지 기준이 비교적 덜 까다롭습니다. 그 까닭에 애플과 같은 기업들은 설립 초기 나스닥 상장을 통해 자금을 모았고 현재는 공룡이 됐습니다. 애플처럼 나스닥에 상장해 크게 성장한 곳은 많습니다. 심지어 미국 기업 시가총액 톱10 중 상당수가 나스닥 상장 기업입니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이 외부 자금 유치를 위해 비교적 손쉽게 진입할 수 있는 시장인 셈입니다.
그다음으로는 AMEX(American Stock Exchange)가 있습니다. AMEX는 1929년 New York Curb Exchange로 개장했습니다. 이후 2008년 뉴욕거래소를 운영하는 유로넥스트에 인수돼 AMEX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3개의 거래소 중 상장기준이나 유지기준이 가장 낮습니다. 이 때문에 주로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상장돼있습니다.
그동안 업계에서는 줄곧 쿠팡이 나스닥에 상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습니다. 쿠팡의 실적이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막대한 규모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서입니다. 여기에 NYSE보다는 나스닥이 상장이 더 용이하다는 점도 이런 추측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물론 김범석 의장이 10년 전 직접 '나스닥 상장'을 언급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여기에 구글과 아마존 등 테크 기업들이 주로 나스닥 상장을 통해 외부 자금을 유치했다는 점도 쿠팡이 나스닥에 상장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 배경이었습니다. 나스닥은 NYSE보다 하이테크 기업에 개방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쿠팡의 입장에서도 현재는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미래 성장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 나스닥이 더 유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쿠팡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NYSE 상장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가장 신빙성 있는 분석은 보다 많은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쿠팡은 그동안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비전펀드에서 약 34억 달러(약 3조7600억 원)를 투자받았습니다. 손 회장은 이 투자금의 회수를 선언한 상태인 만큼 쿠팡으로서는 투자자들의 엑시트 전략을 고민해야하는 시점입니다.
쿠팡이 선택한 NYSE는 세계 최대 증권 거래소입니다. 나스닥보다 규모가 큽니다. 그만큼 더 많은 자금 확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불어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매출이 큰 폭으로 늘고 적자 폭을 줄여가고 있는 만큼 실적 회복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도 볼 수 있습니다. NYSE의 상장 기준이 깐깐하기는 하지만 실적이 계속 성장하고 있고 조만간 흑자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겠다는 복안인 셈입니다.
실제로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S-1 서류에 따르면 쿠팡의 영업손실은 2018년 1조 1650억 원에서 작년 5842억 원으로 줄었습니다. 매출액도 2018년 4조 4873억 원이었던 것이 작년에는 13조 2378억 원으로 3배 가량 성장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매년 매출액은 급성장하고 있고 손실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자신 있게 내보인 겁니다.
더불어 NYSE 상장에 성공할 경우 대외적인 신인도도 올라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계 최대 증권 거래소에 상장한 만큼 외부에서 쿠팡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질 겁니다. 해외 자금 유치에도 훨씬 수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쿠팡의 NYSE 상장 추진은 오랜 기간 계산된 고도의 전략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적으로도 나스닥 상장과 NYSE 상장을 두고 깊은 고민을 했었다는 후문입니다.
쿠팡의 NYSE 상장 추진 소식이 전해지자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블룸버그는 쿠팡의 기업가치를 300억 달러(약 33조 원)로 평가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500억 달러(약 55조 4000억 원)로 보는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기업가치 산정이 어찌 됐건 간에 현재 거론되는 액수만 봐도 쿠팡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무척 크다는 점은 명백해 보입니다.
업계에서는 빠르면 오는 3월 중에 쿠팡의 기업공개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쿠팡은 SEC에 제출한 S-1 서류에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쿠팡의 내부 숫자들을 일부분 공개했습니다. 생각보다 쿠팡은 꽤 오랜 기간 NYSE 상장을 준비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외부에서 나스닥 상장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날 때도 쿠팡이 입을 다물어왔던 이유가 이제서야 살짝 이해가 됩니다.
이제 쿠팡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스닥이 아닌 NYSE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행보입니다. 과연 쿠팡이 깐깐하기로 유명한 NYSE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심사를 통과하고 난 이후 쿠팡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까요? 쿠팡은 이미 국내에서 배송 혁명을 이뤄냈습니다. 최근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까지 진출했습니다. 쿠팡의 변신이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