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버린 대형마트의 시대
1993년 11월 12일. 서울 도봉구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이 오픈합니다. 현재 130여 개 매장이 있는 이마트의 시작입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미국에서 유행 중이던 월마트와 프라이스클럽 등 창고형 할인점들을 보고 이마트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이마트는 지금같은 모습이 아닌 창고형 할인점에 가까운 모습이었죠.
이마트만으론 부족했을까요. 1994년에는 신세계백화점이 미국 프라이스클럽과 손잡고 영등포구 양평동에 '프라이스마켓'을 오픈합니다. 프라이스클럽은 1999년 '코스트코'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유일한 외국계 대형마트로 생존 중입니다.
1996년엔 프랑스계 브랜드 '까르푸'가 부천시 중동에 1호점을 냅니다. 까르푸는 이후 이랜드로 넘어가며 '홈에버'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홈플러스에 흡수되면서 사라지죠. 1998년엔 롯데그룹이 서울 광진구 강변에 '롯데마그넷'을 오픈하며 대형마트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90년대 말 대형마트가 우후죽순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97년 터진 IMF 외환위기 속에서 다양한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대형마트의 등장은 필연적이었죠. 시장보다 깨끗하고 저렴한데다, 친절하고 밤 늦게까지도 영업하는 대형마트는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덕분에 2010년 즈음까지 대형마트는 전성기를 보냅니다.
하지만 이후 대형마트는 오랫동안 정체의 시기를 거칩니다. 먼저 찾아온 건 '외풍'입니다. 2012년 대형마트 규제가 시작되며 신규 출점이 사실상 막혔고요. 심야영업과 셔틀버스 운영도 금지됐습니다. 의무휴업일도 생깁니다. 인근 상권을 잡아먹는다는 비판 때문입니다.
2020년대 들어서는 이커머스의 추격이 매섭습니다. 아니, 대형마트 1위 이마트의 지난해 매출이 29조원인데 이커머스 1위 쿠팡의 매출이 31조원이니 이미 역전당했다고 해도 되겠죠. 더 저렴하고 더 간편한 이커머스와 배송 혁신의 만남은 대형마트의 존재 이유에 의문을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전문점으로
위기의 시대, 대형마트가 꺼내든 카드는 '전문점'입니다. 원래 대형마트는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걸 앞세운 업태였습니다. 먹거리부터 생활용품, 가전, 전자제품까지 구매할 수 있는 '논스톱 쇼핑센터'였죠.
수많은 상품이 있다는 의미의 '백화점'보다 더 백화점다운 게 대형마트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엔 특정 카테고리를 크게 강화하는 전문점 방식으로 리뉴얼하는 매장이 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다 팔아선 이커머스를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나온 결론입니다.
그 중에도 대형마트가 집중하는 건 역시나 '식료품(그로서리)'입니다. 오프라인 매장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이커머스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게 먹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커머스로 식료품을 구입할 때는 신선도나 상태 등을 제대로 검수하기 어렵죠. 냉동식품의 경우 녹아서 오는 경우도 간혹 있고요. 먹을 것 만큼은 눈으로 보고 사겠다는 소비자가 아직 많은 이유입니다.
홈플러스는 일찌감치 그로서리 특화 매장인 '메가푸드마켓'을 늘리고 있습니다. 메가푸드마켓은 2022년 2월 인천 간석점에 첫 선을 보인 매장인데요. 입구에서부터 베이커리·즉석식품 매대를 설치하는 등 이름처럼 '푸드'에 집중한 특화 매장입니다. 반응도 좋아서 현재 전체 홈플러스 매장 중 30% 가까운 매장이 메가푸드마켓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롯데마트도 지난해 말 서울 은평점을 리뉴얼한 '그랑 그로서리'가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전체 구성의 90%를 식품으로 채운 식품 전문관입니다. 지난 21일엔 서울 강남 도곡동 롯데슈퍼도 '그랑 그로서리'로 탈바꿈했습니다. 다양한 상품을 채우기 애매한 SSM의 크기를 반대로 활용해 식품으로 꽉 채운 겁니다. 이마트도 조만간 그로서리 특화 매장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롯데마트는 용인 신갈점에 또다른 특화 매장을 시도했습니다. 매장 1층을 통째로 반려동물 특화 매장 '콜리올리 펫타운'으로 꾸민 겁니다. 신갈점 주변 상권에서 반려동물과 생활하는 가구 비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 도전입니다.
대형마트의 특화 매장 움직임은 넓고 얕은 이커머스의 상품 구성에 대응하기 위한 좁고 깊은 상품 구성 전략입니다. 카테고리는 좁히되, 카테고리 내 상품의 종류와 구성을 깊이있게 준비해 '목적이 있는' 고객의 방문을 유도하는 겁니다.
출점 규제 이후 창고형 할인점·체험형 매장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던 대형마트의 또다른 변화는 진화로 귀결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한 번 실패를 겪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던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까요. 그도 아니면 결국 이커머스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까요. 우리는 지금 쇼핑 역사의 분기점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