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가 서울 성수동을 떠나 남대문 인근에 새 둥지를 틉니다. 성수동 본사 건물 매각으로 얻은 자금을 이커머스 등 디지털 자산에 투자하겠다는 건데요. 보통 본점·본사 같은 경우 상징성이 커 웬만해선 잘 매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 이마트의 본사 매각은 '고정된 오프라인 자산에 더 이상 목을 매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칭기즈칸이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한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마트 성수동 본사의 토지와 건물은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게임업체 크래프톤이 인수했습니다. 1조2000억원을 들였죠. 이마트 성수점 매장은 '세일 앤 리스백'(매각 후 재임차) 방식으로 남기고 본사는 시청 인근 오렌지센터 빌딩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이전 예정 시기는 내년 상반기입니다.
"실탄을 확보하라"
디지털 자산 투자에는 큰 자금이 필요합니다. 오프라인 물류 거점 확보는 물론 배송 경쟁력도 갖춰야 합니다. 이마트는 지난해 '디지털 기업 전환'에 주력했습니다. 노후 점포를 '미래형 점포'로 바꿨습니다. 대형마트 매장의 일부 공간을 활용해 만든 '피킹&패킹(PP)센터'가 대표적입니다. PP센터에선 신세계의 이커머스인 쓱닷컴을 통해 들어온 고객들의 주문을 '집품(picking)'하고 '포장(packing)'하는 작업이 이뤄집니다. 온라인 장보기의 최전선에서 '첨병' 역할을 맡는 곳입니다.
현재 전국의 이마트 점포 수는 159개입니다. 이마트는 이 중 120여 곳을 PP센터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곳에선 하루 최소 200건에서 최대 5000건의 온라인 장보기 주문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마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하루 3000건 이상의 주문을 처리할 수 있는 '대형 PP센터'를 올해 대거 확보할 계획입니다. 기존 PP센터보다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되는 일입니다.
이마트는 지난해 이베이코리아(현 지마켓글로벌) 인수를 위해 3조44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여기에 이베이코리아 인수 후 온·오프라인 매장의 시너지를 위해 풀필먼트(포장·발송 일괄 대행) 시설 확보에도 나섰습니다. 이를 위해선 지속적으로 자금이 투입돼야 합니다. 실제로 이마트는 향후 이 부문에 1조원 이상을 집중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치열한 이커머스 판에서 자금은 곧 실탄입니다. 투자금 보유 여부가 곧 생존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쿠팡이 미국 증시에 상장해 자금을 모은 것도, 마켓컬리가 상장에 나서고 있는 것도 모두 이커머스라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실탄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마트가 본사를 매각하면서까지 실탄을 장전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부동산에 주목하다
사실 유통산업에서 수익을 내는 방법에는 물건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부동산도 있습니다. 물건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수익을 내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매장 개점 시 '입지'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좋은 입지에 입점할 경우 판매에도 도움이 되지만 입지한 곳의 가치가 올라갈 경우 해당 기업의 자산 가치도 늘어납니다. 각 유통업체마다 입지를 전문적으로 살피는 팀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마트가 본사를 매각한 것에는 성수동 일대의 부동산 가치 상승도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한강 근처인 성수동은 서울에서도 금싸라기로 불리는 땅입니다. 여기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면서 재개발에 대한 기대도 커졌습니다. 이마트 입장에선 매각 적기로 판단했을 겁니다. 시장에서는 크래프톤이 이마트에 3.3㎡당 1억원 중반대의 가격을 치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도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는 평입니다.
이마트 본사 매각에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공격적인 경영 스타일이 반영됐을 겁니다. 필요시 본사 건물도 팔아 실탄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인 셈입니다. 정 부회장은 임원들에게 "부동산을 깔고 앉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마트는 업계에서도 자산유동화를 빠르게 시행한 곳으로 꼽힙니다. 이쯤 되면 정 부회장이 부동산을 팔고 있는 게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으로 맞바꾸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성(城)'이 아닌 '길'을 만든다
본사까지 매각하고 디지털 전환에 애쓰고 있는 만큼 이제는 성과를 내야 할 겁니다. 쓱닷컴의 안착 외에도 정 부회장이 앞으로 보여줘야 할 것들은 많습니다. 지마켓글로벌이 쓱닷컴과 이마트의 생태에 얼마나 유기적으로 녹아들도록 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단순히 온라인 점유율만을 높여 규모의 경제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는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렵습니다. 네이버와의 제휴 효과도 아직 미미합니다.
쓱닷컴도 아직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외형은 커지고 있지만 수익성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해 쓱닷컴의 총거래액은 전년 대비 22% 증가한 5조7174억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영업손실 역시 2020년 469억원에서 지난해 1079억원으로 불어났습니다. 물론 쓱닷컴이 쿠팡과 마켓컬리, 롯데온 가운데서 적자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익성 개선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정 부회장은 부동산이라는 '성(城)'이 아닌 디지털이라는 '길'에 미래를 걸었습니다. 평소 신년사 등에서 '디지털 자산화'라는 말을 줄곧 강조해 왔죠. 준비는 거의 끝나가는 듯 보입니다. 이제 만들어 낸 길을 내달려 그동안의 성과를 모두에게 내보여야 할 차례입니다. 정 부회장의 베팅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수동을 떠나는 이마트의 미래가 몹시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