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게 코로나19는 절망이자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하늘길이 막힌 소비자들은 휴가 예산을 아낌없이 명품·패션에 투자하며 '보복소비'를 이어갔습니다. 샤넬·롤렉스 등의 매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픈런'이 벌어졌습니다. 사실상 유일한 '인증 명품 유통채널'인 백화점은 이에 힘입어 역대급 실적을 냈습니다. 지난해 롯데·신세계·현대 등 주요 백화점 3사가 매출 2조 클럽에 등극했죠.
올해 들어서는 백화점의 발걸음이 더욱 바빠지고 있습니다. 주요 백화점들이 일제히 매장 리뉴얼을 선언했습니다. 롯데백화점은 소공동본점·잠실점·강남점 등을 바꿉니다. 신세계백화점은 경기점과 강남점에 손을 대고요. 현대백화점은 압구정본점·목동점·판교점 등 총 6개 점포 리뉴얼 계획을 밝혔습니다. 여기에 투입되는 예산은 1조2000억원이 넘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같습니다. 바로 '체험형 요소 강화'입니다.
백화점들이 왜 체험형 공간을 만들어야 할까요. 먼저 최근 2년간 백화점의 명품 매출 비중은 코로나19 이전 대비 20%가량 높아졌습니다. 달갑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백화점의 역할이 '명품 구매처'로 축소될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명품은 수익성이 높지도 않습니다. 각 브랜드가 강한 브랜드 파워를 내세워 판매 수수료를 낮출 것을 요구하니까요. 실제로 백화점 명품 브랜드의 수수료율은 타 상품 대비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시장 상황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엔데믹에 접어들며 해외여행이 재개되고 있습니다. 많은 소비자들이 여름 휴가철 여행 계획을 짜고 있죠. 명품 수요가 어느 정도 낮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명품 구매처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트렌비·발란 등 이커머스 플랫폼 거래액이 전년 대비 250%가량 늘었죠. 시장이 커질수록 브랜드들도 이커머스에 관심을 가질 겁니다. 백화점에게는 분명한 악재입니다.
이 경우 백화점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주요 명품 브랜드의 매출 비중을 낮춰야 합니다. 신명품 등 최근 인기가 높은 브랜드를 다수 입점시키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꼭 명품이 아니더라도 백화점을 찾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양한 체험형 매장, 로컬 맛집 등 차별화된 식음료(F&B) 매장이 필요하겠죠. 이를 추진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요. 바로 공간입니다.
공간의 힘은 이미 검증된 사안이기도 합니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이 대표적 사례죠. 더현대서울 오픈 이전 여의도는 전형적 '주중 상권'이었습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주력 소비자였죠. 주말에 문을 닫는 가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더현대서울 오픈 후 이곳은 '핫플'이 됐습니다. 새로운 쇼핑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의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인증샷을 남기려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고요. 덕분에 더현대서울은 오픈 첫해부터 매출 8000억원을 넘깁니다.
비슷한 콘셉트의 다른 백화점도 실적이 좋습니다. 지난해 8월 오픈한 대전신세계 아트&사이언스는 지난해 4분기 흑자를 냈습니다. 비슷한 시기 개점한 롯데백화점 동탄점도 순항하고 있고요. 이들은 모두 주요 명품 브랜드가 부족한 점포들입니다. 그럼에도 체험 요소를 내세워 고객을 모을 수 있었죠. 주요 고객은 구매력이 있으면서도 연령이 젊은 MZ세대였습니다. 이들이 방문한 김에 상품을 구매한 것이 실적의 핵심 포인트였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이 백화점이 공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명품 매출이 코로나19의 타격을 상쇄한 것은 임시방책에 불과합니다. 미래를 그리려면 젊은 고객이 꾸준히 찾아오는 백화점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특히 이들에게 오프라인 매장은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닙니다. 구매가 목적이라면 이커머스가 더 합리적임을 아는 세대니까요. 때문에 백화점들은 자신들만이 줄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력 타깃도 여기에 맞춰 설정해야 하고요.
백화점들의 노림수는 리뉴얼 점포의 입지에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단 각 백화점의 본점과 강남권 점포는 이미 사업의 핵심입니다. 모든 점포가 쇼핑의 메카로 자리를 굳혔고, 인근 상권의 구매력도 엄청나죠. 경기권은 '라이징 마켓'입니다. 판교·경기남부·인천의 젊은 인구가 늘면서 시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구 상당 수가 인근 대기업 종사자라 가계소득도 높은 편이고요. 백화점의 리뉴얼이 '영앤리치' 소비자를 정조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백화점의 리뉴얼 목표는 단순히 체험 요소를 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을 내세워 소비자 풀을 늘리는 것은 1차 목표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고수익성 소비자'를 '확실히' 유입시키는 겁니다. 따라서 백화점이 제시하게 될 콘텐츠도 대형마트 등과는 다를 겁니다. 일례로 최근 백화점들이 미술품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죠. 자연스럽게 향후 백화점의 역할과 이미지도 크게 바뀔 겁니다. 아직 구체적 그림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죠.
백화점은 비싼 상품을 살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입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다만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항상 변해왔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백화점은 뭔가 부담스럽게 우아한 곳이었죠. 지금은 명품 구매자가 줄서는 곳이라 생각하는 분도 많고요. 점포 리뉴얼은 이런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바꾸는 계기가 될 겁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백화점은 어떤 모습일까요. 고급스럽지만 부담 없이 찾아가고 싶은 친숙한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