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고르기의 시대상
요즘처럼 친환경, 동물복지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시대가 없죠. 비건 열풍 역시 '채식이 몸에 좋다'를 넘어 육식을 위한 비인도적인 도축과 사육 환경 등이 문제로 떠오르면서 더 커진 감이 있습니다. 전자가 '나'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내가 아닌 다른 생명'을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 때문에 최근에는 비건을 추구하거나 동물권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흔하게 '동물복지'를 강조하는 식품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친숙한 게 바로 계란입니다. 대형마트에 가면 산처럼 쌓여 있는 게 계란이고, 어떨 땐 한 개 100원꼴로 살 수 있는 저렴한 식품이 또 계란인데요.
계란을 구매할 때도 고려할 사항이 많습니다. 예전엔 계란을 '고른다'고 하면 주로 맛이나 신선도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이 거칠거칠한 계란이 신선한 계란이다, 깼을 때 노른자가 진한 색인 게 맛이 좋다, 알끈이 선명해야 한다 등 나름의 근거가 있는 선택법부터 갈색 계란이 흰 계란보다 영양가가 높다는 미신같은 선택법도 있었죠.
요즘 가장 중요한 계란 선택법 중 하나는 바로 난각번호를 확인하는 겁니다. 난각번호는 말 그대로 계란 껍데기에 새기는 번호입니다. 산란일과 사육 환경, 생산자 정보가 표기돼 있죠. 이 중 소비자들이 가장 관심있어하는 건 맨 뒤 사육환경번호입니다. 이번 [생활의 발견]에서는 이 사육환경번호 이야기를 조금 더 다뤄볼까 합니다.
난각번호가 뭐길래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이야기해야겠죠. 난각번호의 사육환경번호는 숫자 1~4로 구분됩니다. 4번 계란은 일반적인 양계장의 계란입니다. 1㎡당 20마리의 닭을 사육하는 환경이죠. 닭 1마리당 제공되는 공간은 A4용지 1장과 비슷한 약 0.005㎡입니다. 해외에서는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라고 부르는데요. 유럽연합(EU)에선 배터리 케이지를 이용한 닭 사육이 금지돼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미시간주, 오레건주, 오하이오주를 시작으로 배터리 케이지를 퇴출시키는 추세죠.
지나치게 밀집된 공간에서 사육하다보니 닭이 움직이지 못하고 병이 돌면 순식간에 퍼져나갑니다. 이 때문에 항생제 등을 지나치게 많이 투여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동물복지는 물론 닭이나 계란을 먹는 사람에게도 영향이 갈 수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3번 계란으로 분류되는 개선된 케이지입니다. 형태는 배터리 케이지와 큰 차이가 없지만 닭 1마리당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졌습니다. 1㎡당 13마리의 닭을 사육하는 환경입니다. 1마리당 공간은 0.075㎡로 조금 늘었습니다. 그렇다고 닭이 뛰어놀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닭들은 평생을 케이지에 갇혀 삽니다.
2번부터는 환경이 확 바뀝니다. 일반적으로 '2번 계란'부터 케이지 프리 계란으로 분류하고, '동물복지'라는 말을 붙이곤 합니다. 2번 계란의 차이는 닭들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롭게 자연 속을 뛰노는 풍경을 상상하면 안 됩니다.
1번까지 와야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닭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료를 주는 공간이 있을 뿐 평소에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알을 낳습니다. 집도 있고 뛰어놀 공간도 있으니, 예전 시골에서 기르던 닭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맞습니다. 양계 환경이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입니다.
다만 같은 난각번호라 해도 환경은 농장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똑같은 1번이라 해도 '넓고 깨끗한 실내 공간'에서 생활하는 닭이 있고 정말 들판에 풀어 놓고 기르는 닭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4번 계란이라 해도 구형 양계장과 다른, 청결한 환경에서 만들고 있음을 강조하는 곳들도 많습니다.
착한 계란 사는 법
좋은 계란을 사고 싶은데, 패키지만 보고 무심코 '동물복지구나'하고 골랐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A사의 한 계란은 패키지에 '1등급', '무항생제' 등의 문구가 있습니다. 자유방목했을 것 같은 이름이죠.
하지만 이 계란은 4번 기존 케이지 계란입니다. 항생제를 안 먹였다고 했지 넓은 곳에서 길렀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거든요. 비슷한 예로 목초·마늘 등을 먹은 닭이 낳았다고 마케팅하는 계란들도 대부분 4번 케이지에서 생산한 제품입니다.
반면 제품명에 '동물복지', '자유방목', '풀어기른' 등의 문구가 있다면 1번 혹은 2번 계란으로 볼 수 있겠죠. 물론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은 난각번호를 확인하는 겁니다. 다만 1번 계란의 경우 아직까지 접근성이 아주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아시스마켓이나 마켓컬리 등 1번란을 따로 취급하는 플랫폼이나 백화점 등을 중심으로 판매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형마트에서도 2번란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1번란은 보기 어렵습니다.
가격도 1, 2번란을 선뜻 집어들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컬리에서 무항생제 4번란은 20구 4990원에 판매되고 있는데요. 2번란은 20구 9990원으로 2배 뛰고요. 1번란의 경우 10구 8350원으로 또 2배 가까운 가격이 됩니다. 4번란과 1번란의 가격 차이는 3배가 넘습니다. 무조건 "1번란만 먹자"고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동물복지 계란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늘어나는 건, 계란 한 개를 더 먹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일 겁니다. 짧게는 건강한 닭이 낳은 건강한 계란을 먹을 수 있고, 길게는 비인도적인 사육 환경을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길이 될 수 있겠죠. 저도 오늘은 마트에 가서 동물복지 계란을 구매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