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삭스가 핀테크기업 콘텍스트렐리반트(Context Relevant)에 1350만달러를 투자한 것처럼 국내 금융회사가 핀테크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은행법·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융지주회사법 등 2~3중으로 금융회사를 옭아매고 있던 규제 피할 수 있는 '우회로'를 금융당국이 만들기로 하면서다.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금융회사들이 핀테크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 뛰어들면서 핀테크 M&A 큰 장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한진 금융위 전자금융과장은 "금융업에 진출하는 빅테크와 겨룰 수 있도록 금융사의 플랫폼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겠다"며 "빅테크기업의 도전에 대해 금융회사가 응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디자인 회사 인수한 스페인 은행처럼
4일 금융위는 '금융회사의 핀테크 투자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핵심은 금융회사의 출자대상을 신기술 분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현재 법규를 보면 금융회사의 지분출자를 겹겹이 막고 있다.
은행법과 보험업법을 보면, 은행과 보험사가 금융업과 관련없는 비금융회사에 지분을 15% 이상 출자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여기에 금산법은 금융기관이 비금융회사 주식의 '5%+사실상 지배' 또는 '20% 초과소유'를 금지하고 있다. 금융지주회사법도 금융지주가 비금융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2015년 정부는 금융회사의 업무와 관련된 업종이나 효율적인 업무 수행에 기여할 경우 출자가 가능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전자금융업, 전자금융보조업, 금융전산업, 신용정보업, 금융플랫폼업만 인정하는 '포지티브 방식'을 적용한 탓이다.
이한진 과장은 "2015년과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며 "핀테크 기업이 유권해석에 해당하는지 애매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골드만삭스는 2015년 SNS의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소셜미디어 업체 데이터마이너(Dataminr)에 투자했는데, 국내에선 유권해석을 받더라도 금융회사가 소셜미디어 업체를 인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번 가이드라인을 보면 금융회사가 출자할 수 있는 핀테크 업종은 ▲인공지능(AI)·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 등 4차산업혁명 핵심기술 ▲신용정보업 외 금융분야 데이터산업 ▲금융업 수행에 필요한 ICT 기술 제공기업 등이다.
또 지난 4월부터 시행된 금융혁신법에 따른 혁신금융사업자, 지정대리인 등 규제샌드박스 기업에도 금융회사가 출자할 수 있다.
이 외의 업종에 대해서도 금융위가 인정하는 업종에 대해선 출자가 가능한 '네거티브 방식'이다. 업종은 '정보통신기술 그 밖에 디지털신기술을 활용해 금융산업에 기여하거나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을 말한다.
국내에서도 네거티브 방식이 적용되면 2015년 디자인 회사 스프링 스튜디오(Spring Studio)를 인수한 스페인 은행 BBVA와 같은 사례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 투자실패 면책, 심사기한 30일 이내
금융회사가 출자한 핀테크기업에 대해선 부수 업무로도 운영할 수 있다. 금융회사가 핀테크기업을 자회사로 두고 업무를 맡길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법규상으로도 가능하지만 금융당국이 엄격하게 실무를 해석하면서 핀테크에 부수업무를 맡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다만 앞으로도 금융회사의 경영건전성 등을 해치는 경우는 부수업무를 맡길 수 없다.
투자실패 책임도 면책된다. 현재 핀테크 투자에 실패해 손해를 입힌 금융회사 임직원에 대해선 검사, 제재 대상이 된다. 이 탓에 금융회사 직원들은 핀테크 투자를 꺼리고 있다. 하나은행이 금융당국에 핀테크 투자 실패에 대한 면책을 제안했고, 금융당국은 제재 감경·면제 사유로 적용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의 출자 승인 심사도 빨라진다. 승인 등 여부에 관계없이 3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했다. 다만 공정거래위원회의 경쟁제한성 심사 기간은 처리 기한에 포함하지 않도록 했다.
◇ 금융사, 핀테크에 연간 500억씩 투자 의향
이 가이드라인이 시행되면 금융회사의 핀테크 투자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금융회사는 핀테크 회사를 발굴하는 핀테크랩을 운영하거나 핀테크 회사와 제휴(MOU)를 맺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협업을 해왔지만 앞으로 지분 출자나 인수 등 적극적인 투자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신한금융그룹은 인공지능 기반 투자자문사인 신한AI를 자회사로 설립했고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지난해 이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보회사로 거듭나자'는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은 "은행의 경쟁자는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이라고 지목했다.
금융당국이 최근 실시한 사전 수요조사 결과에 따르면, 금융회사들은 매년 400억~500억원 가량을 핀테크 회사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핀테크 업계에도 외부 투자나 M&A 등을 통한 투자회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핀테크 업계에 M&A 큰 장이 열리는 셈이다.
◇ "가이드라인 불이익 없다…정부가 책임"
이번 가이드라인은 금융행정지도 심의 등을 거쳐 다음달부터 2년간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이한진 과장은 "가이드라인이 운영되는 2년간 금융회사의 핀테크 투자를 허용하는 법을 개정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 할 것"이라며 "만약 개정이 안된다면 가이드라인을 연장하는 등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가이드라인이 법 개정이 아닌 법 효력이 없는 가이드라인 방식으로 적용되는 만큼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도 있다.
실제로 2016년 정부가 내놓은 '개인정보 비식별조치 가이드라인'에 따라 빅데이터 서비스를 제공한 기업과 기관은 시민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이번 '금융회사의 핀테크 투자 가이드라인'도 비슷한 시비에 휘말린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특히 이번 가이드라인은 넓게 해석하면 은행과 산업 자본을 분리하는 '은산분리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해 시민단체가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
이한진 과장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니 (고발될 경우에도) 금융위가 방어할 것"이라며 "불이익이 기업에 돌아가지 않도록 정부가 책임진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4월 '개인정보 비식별조치 가이드라인'도 검찰에서 무혐의 받고 항고도 기각됐다"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행동하는 기업은 정당행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