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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의 보험 인사이트]의도 좋지만 결과 나쁜 '소비자보호의 역설'

  • 2020.04.13(월) 09:30

보험사 광고를 보면 매번 믿음, 신뢰, 사랑 등 긍정적인 단어를 강조한다. 하지만 소비자는 보험을 떠올릴 때 사기, 기만, 불신 등 부정적인 단어를 앞세운다.

이런 현상은 금융관련 소비자 민원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금융산업 중 소비자 민원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분야는 보험이다. 금융감독원 '2019년 금융 민원 발생·처리 동향'에 따르면, 작년 1~3분기 전체 금융 민원 중 보험에서 발생한 민원만 61.9%에 이른다. 보험이 민원 발생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유지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가 단기간에 쉽게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보험사와 이를 통제하는 감독기관도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보험상품에 가입한 경험을 떠올리면, 민원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 소비자가 가입할 수 있는 금융상품 중 무엇인가를 쓰는 곳이 가장 많은 계약서는 보험 청약서다. 수십 장의 서류 곳곳에 확인하고, 쓰고, 서명해야 하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계약 체결을 완료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다른 금융 상품과 비교 이 과정이 비대한 이유는 보험 상품의 특성에 기인한다.

보험은 계약자가 보험료를 납부하면, 사고 후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는 금융 상품이다. 만약 계약에서 보장하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사고는 발생할 수도 있지만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사고가 발생한다고 해도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100세 만기 암보험에 가입한 30세 남성의 경우 향후 70년 동안 암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암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언제 암 진단을 경험할지 알 수 없다.

보험과 관련된 민원 대다수는 계약의 핵심 목적인 보험금 지급과 관련된다. 이 때문에 보험 계약과 관련된 문제는 보험금의 전제조건인 사고 발생 후에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계약 체결과 사고 발생까지 시간차로 인해 책임소재를 가리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보험금 지급 분쟁 원인 중 다수는 상품설명 부실이다. 보험 계약 과정에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3대 의무가 부여된다. 자필서명 준수, 청약서 및 약관 전달과 함께 상품의 핵심 내용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과정은 의무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상품설명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해당 의무를 다했음을 증명하는 과정을 서류로 남긴다. 따라서 보험 계약 체결에 필요한 과정이 늘어난다.

정리하면 보험은 계약체결과 사고발생 시점이 다르기에 계약 관련 문제를 인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문제 원인을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일련 과정이 복잡해진다.

보험사와 비교 상대적 약자인 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면, 과정이 길어져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행해진 사전 조치가 분쟁 시 보험사에게 면죄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계약과 관련하여 분쟁이 발생할 경우 문제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때 보험사는 계약 체결 과정에서 의무사항을 이행했음을 근거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물론 계약서에 남은 서명은 계약자 스스로 행한 것이 맞다. 하지만 보험 소비자는 불확실한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계약 과정의 의무사항을 이행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에 반강제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한다. 이 때문에 향후 분쟁 발생 시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에 걸려 넘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로 인해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강화되어도 목적 달성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크다.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예를 보험 소비자 보호를 위한 여러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년 전부터 감독기관은 이해하기 쉬운 약관을 강조한다. 소비자의 약관 이해도를 높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이를 위해 매년 약관 이해도 평가를 실시한다. 하지만 쉽게 쓰려는 노력은 엄밀성이 충족되어야 하는 약관을 모호하게 만들어 또 다른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약관을 아무리 쉽게 써도 그 분량이 상당하여 이해는 고사하고 읽기에도 벅찬 경우가 많다. 각 보험사의 상품 경쟁이 치열하여 하나의 보험 상품이 품은 특별약관이 수십 개가 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상품의 약관은 분량만 수백 쪽에 이른다. 보험 계약 체결을 위해 소설책보다 두꺼운 약관을 읽을 것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살펴본 것처럼 보호를 위해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조치가 소비자에게서 멀어지거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결국 보험 소비자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호명할수록 보호받지 못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런 경험이 지속되면 보험 산업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모든 금융 산업은 신뢰를 기초로 존재한다. 특히 보험은 미래 불확실한 위험을 담보로 보험료 지출을 강요하기 때문에 상호 믿음이 중요하다. 사고 후 기대한 보험금을 받지 못한다면 보험 산업이 유지되는 근간인 보험료를 납부할 소비자는 없다. 수요층을 보호하지 못하는 산업은 미래를 그릴 수 없다. 그리고 보험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상황은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따라서 소비자를 보호받아야 할 수동적 존재로 두지 말고 신뢰를 공유해야 할 주체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단기간에 중첩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보험의 미래를 위해 모든 참여자가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것부터 꾸준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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