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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계家]<6>星宇①2세들의 浮沈

  • 2013.07.08(월) 11:07

장남 현대시멘트 혹독한 가시밭길…3남 성우전자 몰락
차남 현대종합금속·4남 성우오토 질주…엇갈린 운명

‘현대(現代)의 성장이 곧 국가의 성장’이라 할 만큼 현대그룹의 역사는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하나의 신화로 자리매김했다. 역사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동생들이 ‘왕회장’과 함께 있었다. 한국 경제사의 거목(巨木)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에게 형제들은 핏줄이면서 사업 동지였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탓에 아무리 혈연으로 얽힌 사업 동반자라 해도 그 색깔은 옅어지기 마련이다. 현대그룹은 1947년 서울 중구 초동의 허름한 자동차 수리공장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현대건설의 전신)’라는 간판을 내건 이래 전후(戰後) 복구와 1960~1970년대 경제개발 붐을 타고 건설, 자동차, 조선으로 무한 확장을 했다.

 

그 시기 형제들은 하나 둘 자기 몫을 가지고 분가(分家)해 나갔다. 자신의 일가를 뿌리내리기 위한 자연스런 세포분열이었다. 한라, 성우, 서한, 현대산업개발, KCC는 현대그룹 창업 1세대들이 뿌린 방계그룹들이다.

현대의 방계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고 정순영 명예회장의 성우(星宇)그룹도 ‘왕회장’이 덩치가 커진 그룹의 일부 사업을 떼 주면서 시작됐다. 정 명예회장은 정 창업주의 둘째 동생으로 현대그룹 창업 1세대의 6남1녀 중 셋째다.

 

1940년 한영중학교를 나와 이듬해부터 조선제련, 보광광업 등을 거쳐 1950년 현대건설에 취체역(현 이사)으로 입사했다. 이후 1960~1969년 현대건설 전무, 부사장을 맡아 ‘왕 회장’과 당시 사장이었던 둘째 형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건설의 초석을 다진 장본인이다. 1958년 만들어진 현대건설 시멘트사업부를 1970년 분리해 현대시멘트 사장을 맡으면서 홀로서기를 했다.




경제개발 호재를 안고 있을 때라 출발은 순조로웠다. 오로지 시멘트 한 품목만 파고들어 무난히 사업을 안착시켰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시멘트가 안정 궤도에 들어서자 1975년 현대종합금속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세(勢)를 불렸다. 이어 1985년 현대종합상운, 1987년 서한정기(현 성우오토모티브) 등을 잇따라 세우는 등 파죽지세로 외형을 불렸다. 

그룹다운 면모를 갖춘 1990년, 성우그룹은 마침내 ‘현대’ 이미지 벗기에 나섰다. 사내공모를 통해 그룹명을 ‘성우’로 통일하고, 레저사업 진출을 위해 설립한 성우종합레저산업에 처음으로 ‘성우’ 이름을 붙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대외적으로 본격적인 그룹의 출범을 알렸다. 흩어져 있던 계열사들은 서울 서초동 신사옥으로 집결시켰다.

정 명예회장은 비교적 일찍 대물림을 했다. 부인 박병임 씨와의 슬하에 4남2녀를 둔 정 명예회장은 아들들을 모두 그룹 계열사에 입사시켜 경영수업을 받게 했다. 다음으로 경영수업을 할 때 맡았던 분야를 떼 주면서 자연스레 경영권을 넘겼다. 장남인 몽선(59) 씨로 자신의 후계구도를 확실히 하는 것으로 첫 걸음을 뗐다. 1987년 몽선 씨를 그룹의 모태인 현대시멘트 사장으로 선임했고, 이듬해에는  둘째 아들 몽석(55) 씨를 현대종합금속 사장에 앉혔다.
  
정 명예회장은 이어 1997년 1월 큰아들에게 회장 자리를 내줌으로써 경영권 승계를 사실상 매듭지었다. 3남 몽훈(54) 씨에게는 성우전자·성우정보통신·성우캐피탈 등 IT·금융 계열을 떼 줬다. 2000년 6월에 가서는 4남 몽용(52) 씨가 성우오토모티브를 가지고 분가했다.
  
정 명예회장의 2세들은 지금 부침(浮沈)의 방계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정 회장은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2010년 6월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감으로써 혹독한 고초를 겪고 있다. 3남의 성우전자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차남과 4남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범현대가에서 닦은 넓은 도로 위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범현대가의 대표 산업 조선·자동차에 기대 단 열매를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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