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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계家]<8>성우효광 ①비운의 3남

  • 2013.07.22(월) 09:58

정몽훈 회장, 성우·성우전자 등 자동차부품·IT 승계
외환위기 직격탄 맞고 휘청…2003년 끝내 회생 실패

성우가(家)의 장자(長子) 정몽선(59) 성우그룹 회장은 2002년 4월 3개 계열사를 친족 분리했다. 심하게 말하면 ‘잘라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하다. 한 집안에 두다 보면 부실이 전염병처럼 다른 계열사들에게 까지 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떨어져나간 계열사들이 정 회장의 둘째 동생 정몽훈(54) 성우효광 회장이 독자 경영하던 성우전자, 성우정보통신, 성우캐피탈이다. 고(故) 정순영 명예회장의 아들 4형제 중 가장 늦게 이뤄진 3남의 계열 분리는 그만큼 비애(悲哀)가 녹아있다.

◇성우의 질주

‘왕회장’ 고 정주영 창업주의 둘째 동생인 정 명예회장이 1970년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뒤 그룹의 면모를 갖추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외형 확장 과정에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창업 1세대 방계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본가의 주력사업과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게 그것이다. 

현대그룹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맞춰 1973년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현대중공업의 전신(前身)인 현대조선중공업이 세워진 게 이 때다. 2년 뒤 성우그룹은 서한개발을 세웠다. 용접봉을 생산하는 지금의 현대종합금속이다.

다음으로 손을 댄 게 자동차부품산업이었다. 앞서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 이후 국내외 시장에서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는 자동차산업의 발전 추세를 따른 것이다.  1987년 브레이크 부품업체 서한정기(현 현대성우오토모티브코리아)를 설립했다. 또한 1989년에는 미국 얼라이드시그널사와 합작(90대 10)으로 서한벤딕스가 만들어졌다. 서한벤딕스는 훗날 회사 이름을 그룹명 그대로 ‘성우’로 쓸 만큼 나름 뜻 깊은 계열사다. 성우는 사업 초기 안전벨트를 생산하다가 에어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 현대차에 주력으로 공급했다.

성우를 실질적으로 경영했던 정 명예회장의 아들이 정몽훈 회장이다. 동북고를 졸업한 정 회장은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해 인디애나공과대학 경영학과를 마치고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성우그룹 종합조정실장과 현대시멘트 이사를 거쳐 성우가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사장을 맡았다. 뛰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해 성우 부회장에 올랐고, 1995년에는 미국 TRW사와 합작으로 성우에 에어백 핵심부품 인플레이터를 납품할 자회사 성우TRW도 차렸다. 정 회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현대차를 타고 승승장구했다.

◇IT 진출 악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들 한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정 회장에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결과적으로 성우그룹의 IT 진출은 악수(惡手)였다. 자동차부품, 건설, 레저 부문으로 확장일로를 걷던 성우그룹은 1990년대 중반 야심차게 반도체사업에 뛰어들었다. 반도체부품 리드프레임과 전자회로기판(PCB) 생산을 위해 1996년 6월 성우전자를 설립했다. 이를 위해 아남반도체기술(현 아큐텍)과 기술 제휴도 맺었다.


 



당시 사업전망은 장밋빛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본가에 반도체를 만드는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우전자는 현대전자에 전량 납품하고 생산능력이 확보되는 대로 장기적으로도 수출에 나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아울러 1997년 3월에는 성우정보통신을 세웠다.

정 명예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사실상 마무리된 1997년 4월 정 회장은 성우·성우TRW·성우전자·성우정보통신 등 4개사의 경영을 총괄하는 회장에 오름으로써 자동차 부품과 IT 계열의 경영실권자가 됐다. 성우그룹은 금융사업의 문도 두드렸다. 같은해 7월에 설립된 팩토링·할부금융업체 성우캐피탈도 정 회장 몫이었다.

◇부질없는 사재출연

정 회장은 불운했다. IT부문 주력사 성우전자가 채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1998년 외환위기를 만났다. 때를 잘못 골랐던 것이다. 성우전자는 1999년, 2000년 각각 140억원, 230억원의 경상손실을 기록했다. 유동비율(유동자산/유동부채)은 각각 51%, 37%에 머물렀다. 1년 이내에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 보다 1년 이내 갚아야 하는 돈이 두 배 넘게 많았다는 의미로 그만큼 성우전자의 곳간에 돈이 바짝 말라갔다. 현대전자 또한 정부의 빅딜정책에 따라 1999년 LG반도체를 인수한 뒤 과도한 부채와 반도체 경기 침체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거릴 때였다.

이즈음 성우는 외국계로 완전히 넘어갔다. 1998년 7월 정 회장 등은 성우 지분 51%를 미국 자동차부품업체 델파이에 4000만달러에 매각했다. 유입자금을 부채상환과 지급보증 해소 등 재무구조 개선에 쓰기 위해서였다. 2000년 8월에 가서는 잔여 지분 49%도 넘어갔다. 이를 계기로 ‘성우’라는 이름은 ‘델파이오토모티브시스템스성우’ 라는 긴 사명의 끝에 옹색하게 붙었다가 2004년 6월 ‘델파이코리아’로  바뀐 뒤로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우전자의 적자와 자본고갈이 위험수위에 다다르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채권단으로부터 부실기업 상시 퇴출 검토 대상에 올랐다. 심사 결과 다행히 2000년 11월 퇴출 대상에서 제외되며 한 숨 돌리기는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2001년 11월 만기가 도래한 지급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가 났다. 2002년 1월 회사정리절차(법정관리)가 개시됐지만 2003년 7월에 가서는 이마저 폐지 결정이 내려짐으로써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성우정보통신도 상황은 비슷했다. 2000년 12월 수익사업인 국제전화, 인터넷폰 등의 별정통신 1호사업을 현대통신에 양도함으로써 사실상 휴면법인이 됐다. 주력사가 처참히 무너진 상황에서 성우캐피탈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2002년말 완전자본잠식(자본총계 –220억원)였던 성우캐피탈도 얼마되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정 회장이 성우전자를 살리기 위해 들인 돈은 적지 않았다. 정 회장은 성우전자를 비롯해 230억원 어치의 계열사 주식과 208억원 규모의 경기 하남 소재 토지를 성우전자에게 증여했지만 부질없었다. 정 회장은 지금 ‘성우효광 회장’이라는 ‘낯선 명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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