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5일 오후 대만 828만가구에서 전기가 끊기는 정전이 발생했다. 발전소 직원이 실수로 천연가스 공급 밸브를 2분간 잠가 발전소 연료공급이 중단되면서 대만 전체 가구의 3분의 2 가량이 5시간가량 정전 피해를 입었다.
하루 뒤인 16일 국내 주식시장에서 동부하이텍 주가는 직전거래일(14일)보다 300원 올라 출발했다. 이튿날(17일)에는 전일종가(1만6300원)보다 6.4% 오른 1만7350원에 거래를 마쳤다. 8월 들어 줄곧 하락세를 보이던 주가가 대만 정전사태를 계기로 반짝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 '예측불허' 반도체의 위험요소들
반도체기업의 주가는 정전이나 지진 뉴스에 민감하다. 수백단계의 가공작업이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제조공정의 특성상 어느 한 부분이 멈추면 다른 공정에도 줄줄이 피해가 발생한다. 여러 날 동안 공장 가동이 어려울 정도로 피해가 심각할 땐 전세계 반도체 가격이 요동친다. 공급차질로 반도체 품귀현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곳들이 웃돈을 주고받으며 거래하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007년 8월 초 삼성전자의 기흥사업장이 변전설비 고장으로 21시간 동안 가동이 중단되자 낸드플래시 현물가격이 7% 가량 뛰었다. 삼성은 작업 중이던 웨이퍼가 못쓰게 되면서 수백억원의 피해를 봤지만 경쟁사인 SK하이닉스와 도시바는 주가급등이라는 반사이익을 누렸다.
동부하이텍 주가가 일시적으로 뛴 것도 대만의 정전으로 반도체를 주문받아 생산하는 대만 소재 파운드리 기업들이 생산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전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반도체 공장이 365일 가동하는 까닭
반도체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사고를 대비해 비상발전기와 무정전 전원장치 등의 설비를 갖추고 공장을 지을 때도 진도 6~7 수준의 지진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를 채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가 갑작스럽게 꺼지면서 작업 중이던 문서를 날린 어이없는 경험을 한 뒤 문서저장 기능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듯 반도체기업들도 불시에 닥칠지 모를 사태를 대비해 여러 안전장치를 두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반도체는 멈춰선 생산라인을 재가동하려면 온도, 습도, 압력 등을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한다. 총을 쏘기 전 영점(零點)을 조절하는 것과 비슷하다. 총 한방을 쏠 때마다 영점조절을 다시 해야한다면 전투에서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것처럼 반도체 생산라인도 비슷하다. 최적화된 공정흐름을 회복하려면 길게는 몇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도체업계가 불황기에도 생산라인을 365일 24시간 가동하는 것도 라인이 한번 서면 그 피해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만약 삼성전자의 모든 반도체 생산라인이 하루 동안 멈춰 선다면 그 피해는 얼마나 될까?
삼성전자가 올해 상반기 반도체부문에서 올린 매출은 33조원, 하루 평균 1800억원에 달한다. 멈춰선 라인을 재가동하는데 2~3일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기회손실은 수천억원대로 불어난다. 그래서 열흘에 달하는 역대 최장의 추석도 반도체업계에선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루 3교대로 생산현장을 지켰다.
◇ 무균실보다 깨끗한 클린룸
반도체 생산라인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미지 중 하나가 하얀 방진복을 입고 근무하는 사람들이다.
반도체 회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해 아주 작은 먼지에도 불량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반도체를 만드는 클린룸에선 방진마스크와 모자, 장갑, 덧신 등의 착용이 필수로 돼있다. 민감한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방진복은 정전기를 방지하는 최첨단 소재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을 금기시하는 곳이 클린룸이다. 천끼리 닿았다가 정전기라도 발생할까 걱정해서라고 한다.
클린룸은 '클래스'라는 단위로 청정도를 관리한다. 클래스1은 약 30㎝의 정육면체 공간에 0.5μm(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먼지가 1개 이하로 관리되는 것을 말한다. 클래스10은 먼지 10개, 클래스100은 먼지 100개 이하까지 허용하는 청정도를 의미한다. 반도체 공장은 클래스1에서 클래스 1000 수준의 청정도가 유지된다. 병원 무균실의 청정도가 클래스 100에서 클래스 10만까지인 점을 감안하면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 순수한 물, 그보다 진한 땀
반도체 공정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물이다. 식각이나 포토, 증착 등 각 공정에서 전기 못지않게 물이 많이 사용된다. 생산장비의 열을 식히거나 각종 화학물질을 정화할 때, 클린룸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때도 물이 필요하다.
SK하이닉스 이천공장을 예로 들면 지난해 하루평균 6만8000톤(연간 2499만톤) 이상의 물을 남한강 등에서 끌어와 사용했다. 이천시민 전체(22만명, 1인당 228ℓ 가정)가 하루 동안 사용하는 수돗물 양과 맞먹는 규모다.
다만 반도체 공정에서 쓰는 물은 우리가 먹는 물과는 다르다. 물에는 다량의 무기질과 미네랄 등이 녹아있는데 이러한 성분이 반도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이온성분을 제거한 순수한 물(De-Ionized Water)을 사용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용도로 사용하는 물에 비해 더 까다로운 정수과정을 거친다.
반도체 공장은 그 자체를 거대한 공기청정기나 정수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무결한 공간은 아니다. 24시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선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할 수 없는 곳이 반도체 공장이다. 한국이 세계 1위의 반도체 강국이 되기까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온 수많은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