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5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직원 3명이 짐을 쌌다. 섀시 부품을 설계하던 이형무 연구원(38)과 여러 신차 제작 프로젝트에서 실제 차량부품 제작을 맡아온 권종호 기술기사(45), 실증 테스트 분야 서은석 책임연구원(38) 등 모두 10년 이상 차를 들여다본 베테랑 엔지니어들이었다.
이들이 다시 짐을 푼 곳은 현대차 전략기술본부가 있는 의왕 중앙연구소 7층, 지금은 'H스타트업팀'이 모여있는 사내벤처 플라자였다. 친환경차 선행연구를 하며 남양연구소에서도 다수 특허 보유자로 손꼽히는 최금림 연구원(39)도 얼마 뒤 합류했다.
2년이 채 안된 최근 이들은 '폴레드(poled)'란 브랜드로 카시트를 만들어 시장에 내놨다. '슬레드 위의 북극곰'(Polar Bear on the Sled)'이란 뜻이란다. 폴레드는 더미(실험용 인형)를 싣고 충돌 실험을 하는 장비 '슬레드'와 팀 멤버 중 한 사람의 별명 '북극곰'을 조합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 신형 산타페에 장착돼 경기도 고양 킨텍스 유아용품 전람회에 전시중인 폴레드 카시트.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 "차 좀 아는 사람들이 만든 카시트"
폴레드와 일반 카시트의 가장 큰 차이는 현대차라는 완성차 대기업이 '백그라운드'라는 점이다. 이 사내벤처를 처음 기획한 이형무 연구원은 "인증 수준을 넘는 가혹한 시험과 실제 차량장착 충돌시험 등 100여 회에 가까운 실증 테스트는 일반 유아용품 회사는 상상도 못 할 과정"이라며 "자동차 개발에 비견할만한 엄격한 눈높이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일반 카시트 인증 때 가해지는 충돌가속도는 196~274m/s². 하지만 이들은 현대차 연구소 내 슬레드를 이용해 인증 기준보다 2배 이상 강한 470~539m/s² 가속도로 테스트를 진행해 유럽 신차 안전도 평가(EURO-NCAP) 인증을 통과했다.
국내인증(KC)이나 유럽 일반인증(ECE-R44)에 없는 측면충돌 성능도 시속 50km로 테스트해 EURO-NCAP 인증을 받았다. 측면충돌은 전체 자동차 사고의 약 47%나 된다. 현대차가 최근 선보인 신형 싼타페에서는 개발단계부터 이 카시트를 장착해 다양한 각도와 충격상황에 대비한 더미 테스트를 해봤다.
▲ 전방추돌경보 신호를 받아 안전띠가 더 죄여지는 기능을 시연하는 폴레드 카시트.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현대차 사내벤처여서 자율주행차에서나 볼 수 있는 첨단기술도 접목할 수 있었다. 지난해 제네시스 EQ900과 함께 개발된 '프리 세이프티(Pre-Safety) 기술이 그것이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전방추돌경보(FCA) 신호를 받아 안전띠를 더 바짝 죄어 시트 안 유아의 신체 이격을 최소화하는 기능이다.
또 충격이 가해진 찰나에 띠 고정물에 살짝 탄력을 주는 'Y-로드미리터'라는 기술도 일부 제품에 들어갔다. "포수가 강속구를 받을 때 살짝 미트를 당기는 식으로 사고 때 띠가 아동의 신체에 주는 최대 200kg 수준의 충격을 30%까지 줄여주는 장치"라는 게 이 연구원 귀띔이다. 이 기술은 유아용 카시트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 '아빠가 된 그들' 하던 일을 던지다
이들이 유아용 카시트 개발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단순했다.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이 연구원은 "총각으로 입사해 첫 아이를 낳은 2010년에 처음 공모에 도전해 고배를 마셨다"며 "하지만 내 아이와 함께 더 안전하게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과 정말 우리가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끝내 미련으로 남았다"고 했다. 결국 다시 준비해 재도전한 그는 기회를 잡았다.
이 연구원은 "자동차를 오래 봐왔던 사람들이 만들면 더욱 시너지가 큰 아이템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설계는 물론 제어과 제작, 시험 등 여러 방면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은 엔지니어들만 '꼬셔(?)' 팀을 꾸렸다. "그만큼 단순한 유아용품이 아니라 자동차 일부로 설계하고 개발한 상품"이라는 설명이다.
▲ 이형무 현대차 H스타트업팀 '키즈올' 연구원이 카시트 사업 창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폴레드는 올해 들어 유아용품 전람회(베이비페어)나 온라인 판매로 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팀이 꾸려진 지 단 1년 8개월만의 일이다. 맨땅이었다면 생각 못 할 속도다. 공모에 당선된 팀 구성원들의 열정은 물론 새로 시작한 사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현대차 사내 벤처시스템, 투자와 시제품 생산에 관심을 갖져준 협력업체 등이 함께 일군 성과다.
만약 현대차 직원이 아니었다면? 이 연구원은 "결코 이렇게 일을 벌이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그저 돈만 많은 창업자였다면 제품을 만들어 볼 순 있어도 제대로 차와 연결할 수도, 그걸 테스트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며 "차를 10년 이상 들여다본 엔지니어만 모신 이유도 전문성 속에 창의성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첫 카시트 제품을 만들어낸 단계지만, 그 다음은 차와 완전히 연결돼 안전성능을 발휘 할 수 있는 카시트를 개발하는 것이 계획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동차 시트 자체를 어른 아이 누가 타더라도 신체를 안전하게 감싸도록 하는 가변형 내장재로 만드는 게 이들의 청사진이다.
현대차 사내벤처인 H스타트업팀 최종 목표는 분사(스핀오프)다. 폴레드를 만든 키즈올팀도 내년 상반기를 그 시점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분사를 하려 해도 기술과 판촉능력 등 여러 방면에서 사업성과 함께 재무적 독립성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2000년부터 시작한 현대차그룹에서 태어난 사내스타트업 수는 37개 이 가운데 실제 창업이 성공해 분사까지 한 기업은 9개뿐이다.
◇ 9개사 분사한 18년 전통 'H스타트업팀'
이름은 때마다 바뀌었지만 현대차 사내벤처 육성시스템은 18년이나 됐다. 생각보다 꽤 역사가 길다. 초창기 사내 스타트업의 경우 주로 수입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중점을 뒀지만 최근에는 자율주행과 사물인터넷, 친환경차 등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현재 내부에서 육성 과정을 밟고 있는 스타트업 팀은 총 10개다.
H스타트업팀이 롤모델로 잡고 있는 선배기업들도 쟁쟁하다. 자율주행 카메라 센서 전문업체인 PLK 경우 2003년 3명이 분사해 현재 52명 규모로 성장했다. '액티브 후드 시스템'으로 2011년 분사한 아이탑스는 전자부품 모듈로 사업분야를 확장해 최근 신사옥까지 지었다. 2012년 분사한 오토앤은 매출 300억원이 넘는 애프터마켓 업체로 성장했다.
▲ (왼쪽부터) 현대차 H스타트업팀 '키즈올' 서은석 책임연구원, 권종호 기술기사, 이형무 연구원, 최금림 연구원이 23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유아용품 박람회에서 제품 소개에 나섰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현대차 입장에서는 창업을 지원해 개발한 신상품이나 기술을 본체 사업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직원들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자기 사업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공모에 당선만 되면 월급을 받으면서도 정해진 근무시간과 상관없이 내 사업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대충하는 사람이 있을까?
키즈올팀에서 가장 연장자로 작년에 합류한 권종호 기술기사는 "그동안 회사에서 보낸 십수 년과는 생판 달랐던 1년이었다"면서 "일이 생각대로 됐을 때 성취감이든 실패했을 때 괴로움이든 마치 야생에서처럼 생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현대차에 적을 두고 있으니 제대로 창업을 했다고 이야기하기는 이르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현대차 관계자는 "작년까지는 현대차와 기아차만을 대상으로 운영했지만 올해부터 현대자동차 그룹사 전체로 공모 대상을 확대했다"면서 "최근에는 응모 분야도 자동차에만 치우치지 않고 모빌리티 서비스와 철분말 윤활제, 버섯 균사를 이용한 친환경 소재 개발 등 이종 산업까지 넓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