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LG가 쌓아온 고객가치 창조, 인간존중, 정도경영이라는 자산을 계승·발전시키고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개선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장기반을 구축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무로 몸담고 있다가 단 하루만에 회장으로 직급이 수직상승한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29일 열린 ㈜LG 이사회에서 이 같은 인사말을 했다. 만 40세의 젊은 총수가 처음으로 발신한 메시지 치고는 차분하다 못해 밋밋한 느낌을 주는 발언이다.
▲ 지난달 29일 만 40세에 재계 4위 LG그룹 회장직에 오른 구광모 회장. |
23년 전인 1995년 아버지인 고(故) 구본무 회장은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고 저력입니다. 오직 초우량을 목표로 삼는 강한 LG를 만듭시다."
'세계 초우량 기업'이라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고 구 회장과 달리 아들인 신임 구 회장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나타냈다.
회장직에 오르기 전 5년 이상 그룹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후계자로서 자신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었던 아버지와 달리 준비기간이 짧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구 회장은 2006년 입사해 12년 만에 회장직을 달았다. 고 구 회장이 입사 이후 20년만인 만 50세에 LG그룹을 이끌게 된 것과 비교하면 경력이 짧다.
▲ 고(故) 구본무 회장은 1995년 2월 회장 취임식에서 "세계 초우량 기업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
LG그룹이 구 회장 선임 직후 보도자료에서 "계열회사는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 체제를 유지한다"고 발표한 것도 구 회장이 아직은 독자적으로 중요사안을 결정할 만큼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하현회·조성진·박진수·한상범·권영수·차석용 등 부회장 6명을 비롯한 전문경영인이 그룹을 이끌어가는 구도가 될 전망이다.
LG그룹도 "구 회장이 상당기간 미래 준비를 위한 경영 구상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야구로 비유하면 당장 마운드에 등판시키기보다는 전지훈련을 통해 체력을 기른 다음 관중들 앞에 서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구 회장이 온전히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LG그룹이 처한 환경이 녹록지 않아서다.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은 2015년부터 적자를 기록해 지금까지 누적 영업손실이 2조원을 넘었다. 피처폰을 연간 1억대 이상 팔며 승승장구하던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흐름을 읽지 못하고 기존 성과에 안주했던 게 뼈아픈 실책으로 남았다. 그 뒤 'G 시리즈'를 내놓으며 반전의 기회를 모색했지만 선두업체들과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올해 1분기 LG전자의 글로벌 스마트폰시장 점유율은 3.3%에 불과했다.
▲ 현재 LG그룹은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등 핵심사업 영역에서 고전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
디스플레이 분야도 중국발 LCD 공급과잉으로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LG디스플레이는 올해 1분기 영업손실 983억원을 내면서 6년만에 적자를 기록했다. LG디스플레이가 주도하는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는 아직 시장이 충분히 커지지 않았고, 그나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소형 OLED는 삼성이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새로운 먹거리인 자동차부품(전장) 사업 역시 매출은 늘고 있으나 수익성은 여전히 기대에 못미친다. 최근 ㈜LG와 LG전자가 오스트리아 자동차 헤드램프 기업인 ZKW를 1조4400억원에 인수한 것도 전장사업에서의 부족한 기술력과 영업력을 보완하려는 측면이 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핵심사업의 부진이 계속되면 결국 구 회장이 직접 구원투수로 나서라는 시장의 요구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몸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라섰다가 실책이라도 하면 40대 젊은 총수인 구 회장의 리더십에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다. 결국 선발투수 격인 전문경영인들이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구광모 호'의 안착 여부가 좌우될 전망이다.
"경영자란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아내어 변화를 추구하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도전적 목표를 세우고 끈질기게 파고들어 반드시 성과를 이루어 내는 것이 경영자가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고 구본무 회장, 2002년 4월 신임임원교육)
10여년 전 고 구 회장이 임원들에게 강조한 성과주의 덕목이 가장 필요한 때가 지금 찾아온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