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세계 3대 자율주행업체 '앱티브(Aptiv)'와 맞손을 잡는 데 2조4000억여원이라는 거금을 던졌다. 이 그룹의 역대 최대규모 외부사업 투자다. "지금까지 현대차그룹의 전략투자가 미래 사업의 여러 변화 가능성에 발을 담그는 수준이었다면, 이번 투자는 아예 웃통을 벗고 자율주행이라는 바다에 몸을 던진 격"이라고 업계 한 관계자는 표현했다.
그 만큼 과감한 선택이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그룹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기 시작한 작년 9월 이후 꼬박 1년만에 만든 변화의 가시화다. 정 부회장은 작년 승진 즈음 인도에서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제공 업체로 전환할 것"이라고, 올해 시무식에서는 "시장 판도를 주도하는 게임체인저로 도약할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전략투자 '진정성' 확보
작년 현대차 영업이익 전체
합작에 쏟아부은 셈
작년 이후 현대차그룹의 미래 사업을 위한 투자가 잦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감질나는' 수준이었다. 25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모비스 등 그룹 주력 3사의 올 상반기 미래전략 사업 관련 신규투자는 총 17건(3개사 중복투자 및 사내벤처 스핀오프 포함)이었다. 한 달에 약 3건에 달하는 빈도다.
하지만 투자금액은 총 1918억원뿐이었다. 한 건 당 평균 약 113억원이다. 단일 투자로 가장 큰 것은 '동남아 우버'로 불리는 그랩에 기아차가 851억원을 지난 3월 넣은 것이었다. 투자영역은 친환경차(수소전기차 포함), 자율주행, 공유 모빌리티, 커넥티드카 등 미래 자동차 산업의 다양한 변화에 방향을 맞췄다. 하지만 투자규모는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는 흉내만 낼 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현대차그룹은 앱티브와 합작회사(조인트벤처, JV)를 설립하는 데 총 20억달러(약 2조3900억원)를 투입키로 했다. 현금 16억달러(약 1조9100억원)와 자동차 엔지니어링 서비스, 연구개발 역량, 지적재산권 공유 등 4억달러(약 4800억원) 규모다.
이는 지난 상반기 주요 3사가 집행한 외부 전략투자 금액의 12배를 넘는다. 현대차그룹의 역사를 되짚어 봐도 2011년 옛 계열사인 현대건설을 인수한 것을 제외하고 최대 규모의 외부 투자이기도 하다. 그룹 주력인 현대자동차의 작년 영업이익 전체(2조4200억원)를 이 합작에 쏟아붇는 셈이다.
NH투자증권 조수홍 애널리스트는 이를 두고 "미래 이동성의 변화 대응을 위해 현대차그룹에서 의미있는 규모로 이뤄진 첫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며 "독자 기술개발이나 대응능력에 대한 우려나 '추격자' 이미지를 누그러 뜨릴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JV 투자로 단숨에 '퀀텀 점프'
플랫폼 표준 완성차 업체 공급 복안도
업계에서는 이번 투자가 현대차그룹을 자율주행 분야에서 세계 최선두 그룹에 합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 아직 어떤 완성차 업체와도 손잡지 않았던 앱티브가 순수 자율주행 기술로는 글로벌 3위의 위상을 가진 업체여서다.
앱티브는 2017년 12월 '델파이'로부터 분사한 차량용 전장부품 및 자율주행 전문 회사다. 작년 기준 매출 15조9000억원, 영업이익 1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시가총액은 27조4000억원(미국 나스닥 상장)으로 현대차(9월24일 기준 28조5247억원)와 엇비슷하다. 전체 인력은 총 14만3000여명에 달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내비건트 리서치에 따르면 앱티브의 순수 자율주행 분야 기술력은 구글에서 분사한 웨이모, 제네럴모터스(GM)가 인수한 크루즈에 이어 3위다. 종합순위로는 웨이모, GM, 포드에 이어 4위다. 이 평가에서 현대차그룹은 종합순위 15위로 쳐져 있었다. 독자적인 노력만으로 단기간에 자율주행 기술 격차를 좁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현대차그룹이 딱 '50대 50' 비율의 JV 방식을 택한 데도 이유가 있다. 아예 인수를 하기에는 재무적, 기술적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이, 50% 미만의 지분을 투자하기에는 앱티브가 가진 앞선 기술을 현대차그룹 안으로 내재화하기에 어렵다는 점이 걸렸기 때문이다.
구글의 스마트폰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처럼 JV가 개발할 자율주행 플랫폼을 표준화해 다른 완성차 업체에도 심을 수 있게 하려는 복안도 깔려 있다. 현대차 측이 "완전 인수의 경우 타 업체에 대한 기술 폐쇄성으로 인해 호환성이 부족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고 밝힌 데서 이런 의중이 드러난다.
현대차는 이번 합작 투자에 콜옵션을 통한 '안전핀'도 달았다. 앱티브가 합작회사 지분을 직간접으로 보유하는 사업부를 분할매각 등 처분하는 경우 등 합작회사 보유지분 가치를 50% 이하로 떨어뜨리는 계약을 맺으면 이번 JV 투자계약을 뒤집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파트너 삼은 결정적 이유
"자율주행 전기소모 많아
수소전기차에 더 적격"
이번 투자는 정의선 수석부회장 체제 1년을 맞은 현대차그룹이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제공 업체 전환'이라는 구호를 현실로 한발짝 더 앞당긴 것으로 평가된다. 자율주행은 ▲커넥티비티(Connectivity) ▲자율주행(Autonomous) ▲서비스(Service) ▲전동화(Electric) 등 'C.A.S.E.'로 대표되는 자동차 산업의 급속한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최고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계약을 위해 뉴욕을 찾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앱티브를 파트너로 택한 이유로 '안전과 효율성을 가장 중시하는 사업철학'을 들었다. 정 부회장은 "구글은 일찍부터 자율주행에 뛰어들어 많은 데이터를 모았지만 자율주행은 구글 생태계 사업의 일부"라며 "하지만 앱티브는 자율주행 그 자체가 목적인 회사"라고 합작 파트너를 소개했다.
현대차그룹이 집중하는 수소전기차 사업이 자율주행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도 정 부회장이 품는 기대 가운데 하나다. 그는 "자율주행 시스템에서는 전력 소모가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에 현재의 배터리 전기차로는 한계가 있다"며 "장거리를 운행할 수 있는 수소전기차가 자율주행에 더 적격인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
앱티브 입장에서도 현대차와의 합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가진 레벨 2·3 단계 자율주행을 위한 첨단주행보조기술(ADAS)이나, 완성차 제조 및 디자인의 품질과 신뢰성이 자사가 개발 추진하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구현하는데 적합하다는 게 가장 크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이 구축한 5세대 이동통신망(5G) 인프라도 자율주행 기술개발을 가속할 수 있는 매력적 환경요인이 됐다.
앱티브는 현대차그룹과의 계약 후 "JV는 한국에 핵심 기술센터를 두는 것뿐 아니라 자율주행 플랫폼을 구축하는 기반이나 자율주행 서비스를 구현하는 테스트베드로도 활용할 것"이라며 "현대차의 강력한 내수시장 지위와 한국이 가진 세계 최고 수준의 5G 인프라가 합작 효과를 더욱 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작사는 설립 인·허가와 관계당국 승인 등을 거쳐 이르면 내년 2분기 중 최종 설립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