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약물을 활용하는 약물 용도변경(재창출) 방식의 신약 개발은 개발 기간 단축, 비용 절감 등의 장점이 있지만, 지식재산권 등의 한계가 있다. 바이오 업계에선 약물 재창출 방식을 활성화하고 해당 방식의 신약 개발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신기술 활용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는 10일 '약물 용도변경의 장벽 및 활성화 방안' 보고서를 발간했다. 협회는 신약 개발에 있어 약물 재창출 방식의 장점과 한계를 분석하고, 활성화를 위한 방안 등을 제시했다.
약물 재창출은 시판 중이거나 임상에서 안전성 외의 이유로 상업화에 실패한 약물의 새로운 적응증을 발굴하는 신약 개발 방법이다. 제약바이오 기업이 약물 재창출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신약 개발 기간과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어서다. 개발 중인 후보물질이 다른 질환에도 효능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때문에 후보물질 탐색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약의 경우 이미 안전성이 검증된 만큼 임상1상 단계를 생략 가능하다. 또 이미 확보된 데이터를 활용, 규제 당국의 승인 절차도 가속화할 수 있다.
협회에 따르면 2007년에서 2009년 사이 미국 식품의약국(FDA)가 승인한 신약 및 생물학적 제제의 약 30~40%가 약물 재창출 제품에 해당했다. 또 1984년부터 2009년까지 FDA가 승인한 혁신 약물의 35%가 약물 재창출 제품이었다. 특히 코로나19 기간 신속한 치료제 개발 필요성이 커지면서 약물 재창출 방식으로 신약 개발에 나선 제약사가 급증했다. 이후 FDA가 약물 재창출 방식으로 개발한 항바이러스 치료제 '베클루리주'(성분명 렘데시비르)를 세계 최초 코로나19 치료제로 긴급사용 승인하며 약물 재창출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다만, 약물 재창출 방식은 한계도 많다. 신약 개발에 드는 초기 비용은 줄일 수 있지만, 약물 재창출 역시 수십억 달러의 규모의 비용이 필요하다. 박봉현 한국바이오협회 책임연구원은 "약물 재창출은 약물 개발 위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킬 뿐"이라며 "비임상 및 초기 임상 단계에서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만 임상 후기 단계에서 용도가 변경된 화합물은 다른 화합물과 동일한 실패율을 보일 수 있고 새로운 적응증에 대한 2상 및 3상 임상을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식재산권이나 데이터 접근성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제약사는 화합물에 대한 특허를 취득, 다른 사람이 특허권 없이 해당 화합물을 개발하지 못하도록 막는 전략을 활용한다. 이 중 물질이전계약(MTA)은 유독 어려운 데다 시간이 많이 소요돼 개발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제약사가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후보물질 관련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것도 약물 재창출 방식의 신약 개발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약물 재창출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처음부터 해당 질환을 겨냥해 개발한 것이 아니기에 효능이 뛰어난 약물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박 연구원은 "일각에선 약물 재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게 혁신과 새로운 약물 개발 활동을 저해해 새로운 치료법을 찾을 가능성에 해를 끼친다고 우려한다"면서 "보류된 약물이 잠재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약물 재창출 관련 과대광고가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약물 재창출 방식으로 승인받은 신약 중엔 기대보다 효능이 좋지 않은 사례가 자주 보고된다. 렘데시비르는 현재 최종적으로 코로나19 치료에 효능이 없다고 밝혀졌다. 국내에서도 수많은 기업이 약물 재창출 방식으로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뛰어든 반면, 이들 기업 중 유의미한 성과를 보인 기업은 한 군데도 없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선 기술과 제도 개선을 통해 약물 재창출 방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우선, 박 연구원은 제약사와 학술 기관, 비영리 기관 및 바이오 기업 간 협력이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공개된 데이터베이스와 결합된 컴퓨터 접근 방식이 약물-질병 반응을 예측하고 잠재적인 약물 재창출 기회를 식별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며 "인공지능 통한 기계학습 기반의 시스템도 약물 재창출 수단의 사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규제 개선 등의 정부 차원 지원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박 연구원은 "세금 인센티브나 규제 개선이 약물 재창출 방식의 신약 개발을 촉진할 수 있는 요소"라면서 "화합물 기증 시 잔존 가치에 대한 공제를 허용하거나 시험 자료를 제3자에게 공유하는 활동에 대한 세제 혜택이 약물 재창출 신약 개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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