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웨이가 최신 반도체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폰을 출시하면서 미국 내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규제 강화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중 추가 제재가 기정사실로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의 피해가 커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는데요.
당장 업계의 관심이 쏠리는 곳은 ‘대중 수출규제 예외대상 유예’ 연장 여부에 있습니다. 유예기간은 오는 10월로 종료됩니다.
연장되지 않을 시 중국에 주요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의 타격은 클 것으로 전망됩니다.
최근 화웨이 신제품에 SK하이닉스가 제조한 D램 등이 탑재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 기업들은 더욱 숨을 죽이는 모양새입니다. 미국의 추가 제재안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얽히고설킨 상황이지만 전문가들의 진단은 생각보다 긍정적입니다.
적어도 단기적 유예는 가능할 것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관측인데요. 중국을 죄기 위해선 미국도 한·미 우호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라는 게 이유입니다. 일각선 반도체 유통과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추가 제재가 나올 가능성도 언급됩니다.
7나노칩 스마트폰 선전에 한국산 D램 필요했던 이유
화웨이가 지난 8월 말 출시한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에 파운드리 업체인 SMIC가 중국에서 생산한 7나노 공정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린9000’ 칩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죠.(▷관련기사:[인사이드 스토리]‘화웨이 쇼크’ 중국 반도체 어디까지 왔나)
여기에 SK하이닉스의 스마트폰용 D램인 LPDDR5와 낸드플래시가 포함됐다고 전해지면서 한국 기업들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요.
SK하이닉스는 “언론 보도 이전에 해당 사실을 이미 파악해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에 신고 후 경위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이 대중 수출 규제를 발표한 2020년 9월 이후 화웨이와 거래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도 재차 강조했어요.
미국 상무부는 “의혹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만 언급, 공식 입장은 아직 내지 않은 상황입니다.
업계는 화웨이가 수출 규제 조치가 내려지기 전 비축한 부품을 활용했거나 혹은 그 이후 중간 공급망을 통해 제품을 확보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D램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고객사가 D램을 대량으로 구매할 경우 이들의 제품을 어떻게든 살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진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미국과 대립 이후 반도체 국산화를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D램 생산기술력이 높지 않은 상황이라 7나노칩을 구동하기 위해선 당장 한국산 D램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 중론입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중국 SMIC가 시스템반도체 뿐만 아니라 메모리반도체도 개발하고 있으나 한국 제품과의 경쟁력에선 뒤쳐진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최소 몇 년 이상이 소요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스마트폰 내 첨단 반도체를 빠르게 움직이려면 성능 좋은 D램이 필수”라며 “중국이 7나노칩을 만들어 스마트 폰에 탑재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해선 한국산 D램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박 교수는 “고성능 D램을 개발하려면 장비가 필요한데 미국이 대중 수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중국이 이를 개발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무리일 것”이라고 부연했습니다.
“유예연장 가능성, 중국 압박에 한·미·일 협력강화”
중국 반도체 기술이 수율 및 성능의 한계에 여전히 묶인 상황이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습니다.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없이 7나노를 만들 순 없을 것”이란 관측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는 점에서 중국의 기술 자립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미국이 이번 화웨이 사태로 지난해 10월 중국 내 반도체 기업들에 취한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조치를 강화할 가능성에 있습니다. 당시 미국 상무부는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공정 시스템반도체 등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미국산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는데요.
전문가들은 이러한 통제 속에서도 중국이 7나노 개발에 성공함에 따라 미국이 추가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레거시(구형)’ 공정까지도 장비 반입을 금할 것이 유력합니다.
최근 마이클 매콜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도 “중국이 저사양 반도체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첨단 반도체뿐 아니라 구형 반도체에 대한 규제도 살펴봐야 한다”고 추가 제재를 시사한 바 있죠.
한국 기업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 조치 예외대상으로 유예기간 1년을 적용받았습니다. 하지만 유예 시점은 오는 10월로 곧 종료됩니다.
한국 정부는 기업들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간 제한이 없는 별도 기준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해 왔는데요. 그간 정부와 업계 노력으로 장비 반입 유예기간 연장 가능성이 높았으나 이번 화웨이 사태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예가 종료되면 수조원이 투자된 중국 반도체 생산라인은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현재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생산량의 40%를 중국 시안 공장에서,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량의 40%를 중국 우시 공장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이에대해 전문가들은 “미국이 대중 규제를 강화할 것”이라면서도 “한국 기업들의 장비 반입 유예기간 연장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전반적 스탠스는 대중 규제 강화로 가닥을 잡겠지만, 한·미 관계 악화를 초래하는 조치 등 극단적 제재를 취할 확률은 낮다는 겁니다. 반도체 강국인 한국과 동맹을 보다 강화하는 게 대중 압박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입니다.
김흥규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미중정책연구소 소장)는 “미국이 유예 연장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한국의 대표적 두 기업을 죽이는 조치로 반발이 강할 것”이라며 “대중 견제를 위해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와중 해당 전선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바이든 정부도 원치 않을 것이고 다만 유통업체를 통한 매점매석이 가능하니 해당 부분에 대한 통제 강화 요구가 있을 순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이어 김 교수는 “윤석열 정부가 한·미 동맹을 강화해온 만큼 이에 대한 결과로 미국 정부에 문제 해결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며 “미국의 결정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외교가 아닌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협의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미국 상무부 부장관이 다음 주 한국을 방문합니다. 돈 그레이브스 미국 상무부 부장관은 방한 기간 동안 한국 기업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유예조치 연장과 중국의 희귀광물 수출통제 대응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