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기획전이 관람객 6만명을 돌파했다. 이번 대규모 기획전은 한국과 일본, 중국 3개국의 불교미술을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조명한 세계 최초 전시다. 미술계에서 '다시 보기 힘든 기획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이번 전시를 통해 3대째 이어온 삼성가의 미술 사랑이 국내 미술문화 부흥과 국민들의 '문화 향유권' 향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 생에 한 번 있을 기회" 6만명 찾았다
'연꽃처럼' 기획전은 지난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후 호암미술관의 첫 고미술 기획전이다. 지난 3월27일 개막 후 오는 16일 폐막을 앞뒀다. 지난달 말까지 약 두 달 동안 6만명이 관람해 하루 평균 관람객 수가 1000명이 넘었다. 삼성문화재단 측은 폐막을 앞두고 관람객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호암미술관은 세계 유수의 불교미술 명품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 5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총 92건으로 한국과 일본, 미국, 유럽에 소재한 27개 컬렉션의 작품을 한 데 모았다. 92건 중 한국에 처음 들어온 작품은 47건이다.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전시회를 기획할 때 대여 작품의 비중은 40% 정도인데, 이번 전시는 대여 작품이 90%에 달한다"며 "이번 전시가 우리 생에 한 번 밖에 없을 특별한 기획전으로 꼽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전시에 포함된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수월관음보살도' 같은 고서화는 전시 기회 자체가 드문 작품이다. 자국 소장처에서도 자주 전시하지 않고, 한번 전시되면 상당 기간 작품 보존을 위해 의무적인 휴지기가 있기 때문이다.
조지윤 삼성문화재단 소장품연구실장은 "고미술품의 경우 손상 우려 때문에 빌려오기 어렵고, 인정 받은 기관에 한해 빌려주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의 18개처에서 52건의 작품을 빌려왔다는 것은 이번 전시에 그만큼 많은 공을 들였고, 호암미술관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재용 회장도 5번 찾아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금동 관음보살 입상'과 '나전 국당초문 경함'이다. 해외 개인 소장가로부터 대여해 온 금동 관음보살 입상, 이른바 '백제의 미소'는 이번 전시에서 국내 최초 일반인에 공개됐다.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백제의 미술이 최고로 발달했던 7세기경에 만들어진 불상이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어 한국미술사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나전 국당초문 경함은 고려시대에 두루마리 형식으로 불교경전을 담았던 직사각형의 상자다. 고려시대 국보급 작품으로 13세기에 '전함조성도감'에서 일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 단 6점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일본, 영국 등 해외 기관·개인의 소유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나전 국당초문 경함은 국가 주도로 제작된 당대 최고 장인들의 작품으로, 보존 상태 역시 가장 양호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밖에 이건희 선대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궁중숭불도 △자수 아미타여래도 등도 함께 전시됐다. 삼성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권1-7 △아미타여래삼존도 △아미타여래도 △석가여래설법도 등 4점도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최초로 공개됐다.
특히 호암미술관은 머리카락 굵기만큼 얇은 붓으로 세밀하게 그려진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전시장 내 '디지털 돋보기'도 마련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비즈니스 미팅 등을 위해 만난 주요 외빈들과 이번 전시를 5번 관람하며, 디지털 돋보기를 직접 시연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3대 걸친 '미술 사랑' 산실
호암미술관은 이병철 창업회장, 이건희 선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3대에 걸친 미술 사랑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산실이다. 해외에 유출되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소멸될 위기에 놓인 민족문화 유산을 수집∙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호암미술관이 국내 미술문화 부흥과 국민들의 '문화 향유권' 향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 창업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 "60세 무렵부터 수집품을 어떻게 후대에 남길 것인지 이리저리 생각했다. 비록 개인 소장품이라고는 하나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라며 "이것을 영구히 보존해 널리 국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전시하는 방법으로는 미술관을 세워 문화재단의 사업으로 공영화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창업회장은 개인적으로 모아 왔던 국보·보물 10여점을 포함한 문화재 1167점을 1978년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했다. 호암미술관은 이 창업회장의 기증품을 기반으로 1982년 4월22일 개관했다.
예술애호가였던 이건희 선대회장은 창업회장의 뜻을 이어 문화재들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중요한 작품이라면 큰 돈을 들여서라도 환수해야 한다는 일념이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업경영과 마찬가지로 미술품 관련해서도 명품제일주의와 '초특급'을 최우선시한 것이다.
이 선대회장은 우리 문화재가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이를 모아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는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도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호암미술관의 상징인 전통정원 '희원'도 선대회장의 작품이다. 호암미술관 개관 당시 미술관 앞 정원은 100여 점의 조각이 전시된 야외 조각 전시장이었으나 이건희 선대회장 주도로 한국 전통정원인 '희원(熙園)'으로 탈바꿈했다.
'이건희 컬렉션'에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해 국내 유명 작가의 작품들이 대거 포함된 것이 선대회장의 미술 사랑을 방증한다. 이건희 컬렉션은 지난 2021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이 이 선대회장이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평생 모은 개인 소장품 중 2만3000여점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하면서 공개됐다.
유족들은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 선대회장의 말씀을 이행하는 것이 고인의 뜻을 기리는 진정한 의미의 상속이라는 데 뜻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