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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변곡점]下 언더독의 베팅, 리더의 결단…HBM 이후 승부는?

  • 2026.02.04(수) 13:40

산업 전환기 갈림길에 섰던 삼성
좌절 딛고 돌아온 SK하이닉스
"HBM 이후에도 최대 수혜는 삼성·SK"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놓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이 새로운 변곡점에 들어섰다. 글로벌 HBM 시장을 사실상 양분한 두 회사는 같은 무대에 서 있지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출발선과 축적해 온 시간은 크게 다르다. 같은 AI 메모리를 두고 각기 다른 역사와 전략이 오늘의 경쟁 구도를 만들고 있다는 평가다.

▶관련기사:[메모리 변곡점]上 "완성도냐 신뢰냐"…HBM4 앞에 선 삼성·SK

삼성 반도체, 결단의 반세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일지./그래픽=비즈워치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1970년대 오일쇼크 국면에서 시작됐다. 제1차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던 시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을 결단했다. 파산 위기에 몰린 한국반도체 인수가 그 출발점이었다.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들여 지분을 인수, 이후 미국 실리콘밸리를 오가며 기술과 인재 확보에 나섰다. 1983년 '도쿄 선언'으로 공식화된 반도체 진출은 해외의 냉소를 불러왔지만 같은 해 64K D램 개발 성공으로 의구심을 뒤집었다.

반도체 사업은 이후 이건희 선대회장을 거치며 성장 궤도에 올랐다.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를 '타이밍의 산업'으로 규정하고 투자 판단과 집행 속도를 끌어올렸다. 삼성은 차세대 제품 개발을 앞당겨 진행했고 1990년대 이후 세계 최초 기록을 잇달아 세우며 D램 시장 1위로 올라섰다. 설계·공정·양산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은 종합반도체(IDM) 구조는 이 시기 삼성 메모리 경쟁력의 토대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80여 차례에 걸친 법정 출석 끝에 대법원 무죄 판결이 확정, 경영 정상화의 명분과 동력이 동시에 확보됐다는 평가다.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자 투자와 사업 판단 역시 다시 최고경영자 중심으로 돌아갔고 글로벌 현장에서의 행보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

무죄 확정 이후 이 회장은 주요 고객사와의 협상 전면에 직접 나섰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의 회동을 통해 차세대 HBM4 공급을 확정했고 테슬라와는 23조원 규모의 AI 반도체 칩 공급 계약을 성사시켰다. 오픈AI와도 월 90만장 규모의 HBM 공급 의향서를 교환했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다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에는 임원들에게 "숫자가 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라며 실적 반등 국면에서의 안일함을 경계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회복 조짐을 성취로 착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근본 경쟁력을 되찾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경고다. 해당 발언은 삼성전자와 전 계열사 부사장 이하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임원 세미나에서 공유됐다. 재계에서는 사실상 이 회장의 신년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SK하이닉스, HBM에 건 승부

SK하이닉스 반도체 사업 일지./그래픽=비즈워치

SK하이닉스 반도체 역사는 '실패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1978년 설립된 선경반도체는 반도체 산업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내다본 시도였지만 기술력 및 자본력 한계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만 이 짧은 실패는 그룹 내부에 "언젠가 다시 반도체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각오로 남았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시도는 2000년대 들어 하이닉스반도체를 통해 다시 이어졌다. 하이닉스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거치며 생존 자체가 과제였고 매각과 해체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기업이었다. 2012년 SK그룹의 하이닉스 인수는 당시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글로벌 메모리 업황은 침체돼 있었고 대규모 투자 부담과 재무 리스크에 대한 우려도 컸다.

인수 이후 SK하이닉스는 불황 국면에서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단기 실적보다 기술 축적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HBM에 베팅했다. HBM은 개발 난도가 높고 초기 시장도 제한적이었지만 그래픽처리장치(GPU)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관련 기술을 꾸준히 쌓아왔다. 시장이 열리기 전부터 시간을 투자한 셈이다.

이 선택은 AI 가속기 시대가 열리며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HBM은 공정 안정화와 패키징 경험, 고객과의 공동 검증이 누적돼야 경쟁력이 형성되는 기술로 평가된다. SK하이닉스는 이 시간을 가장 오래 축적해 온 기업으로 꼽힌다. 현재 HBM 시장 점유율은 60% 안팎으로 추정, 가격 결정권까지 확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HBM 이후의 판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주가 추이./그래픽=비즈워치

AI 경쟁이 격화되면서 메모리의 위상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그간 AI 생태계의 주도권은 GPU를 생산하는 엔비디아나 대규모 AI 모델을 운영하는 빅테크에 있었지만, 연산 성능을 뒷받침할 HBM 없이는 최첨단 AI 가속기 구현이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AI 칩 출시와 데이터센터 증설이 HBM 확보 여부에 좌우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AI 산업의 핵심 병목으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 HBM4 시장에서 양사가 80% 이상을 점유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공급자 우위 구조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립부 탄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메모리 반도체 부족 현상은 최소 2028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개발 붐으로 데이터센터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메모리 수요가 폭증, 차세대 AI 가속기 출시가 고성능 메모리 소비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같은 변화는 기업가치에도 반영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각각 990조원, 650조원 안팎으로 늘어 합산 기준 1600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중국 최대 기술 기업인 텐센트와 알리바바의 합산 시가총액을 웃도는 규모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글로벌 AI 투자 흐름이 플랫폼·서비스에서 반도체 인프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HBM을 잇는 다음 메모리 기술을 둘러싼 논의도 물밑에서 속도를 내고 있다. 'HBM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정호 KAIST 교수는 최근 고대역폭플래시(HBF)를 차세대 핵심 기술로 제시하며 "AI 시대에는 속도를 책임지는 HBM과 용량을 담당하는 HBF가 함께 작동하는 구조로 진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스마트폰 시대에는 저전력이 경쟁력을 갈랐지만 AI 시대로 넘어오면서 산업의 중심축은 메모리로 이동하고 있다"며 "연산 속도를 담당하는 HBM과 저장 용량을 책임지는 HBF를 함께 구현할 수 있는 기업이 AI 반도체 경쟁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두 기술을 동시에 양산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이라며 "AI 시대의 최대 수혜 역시 메모리 기업으로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연간 실적 변화./그래픽=비즈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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