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에 힘입어 나란히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실적 발표 무대에서는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 전면에 부상했다. 두 회사는 지난 1월 29일 한 시간 간격으로 2025년 4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을 열었다. 같은 날 같은 이슈를 놓고 서로를 의식한 발언이 이어진 것은 이례적이다. 업계 최대 고객인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플랫폼을 겨냥한 HBM4 공급을 두고 기술·양산 경험·공급 능력을 둘러싼 신경전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는 평가다.
'재설계 없는 성능' vs '검증된 양산'
SK하이닉스가 포문을 먼저 열었다. 삼성전자보다 한 시간 앞서 실적발표에 나선 SK하이닉스는 "HBM은 단순 기술 경쟁을 넘어 양산성·품질·공급 이행 능력이 동시에 요구되는 제품"이라며 "그동안 축적한 양산 경험과 고객 신뢰는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HBM4 역시 고객과 협의한 일정에 맞춰 준비가 진행 중이며 고객이 요구한 물량에 대해서는 이미 양산을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HBM 레이스 합류를 의식하면서도 기존 우위를 쉽게 내주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삼성전자도 곧바로 맞불을 놨다. 삼성전자는 "고객 요청에 따라 HBM4 양산을 진행 중이며 2월부터 출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개발 착수 단계부터 고객들의 성능 요구 수준이 지속적으로 상향됐음에도 재설계 없이 진행해 왔고 현재 품질 검증 마무리 단계에 진입했다"고 언급했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재설계 없이'라는 표현을 공개석상에서 반복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피드백을 반영, HBM4 개발과 양산 과정에서 일부 공정을 조정한 것으로 알려진 상황을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기술 전략에서도 양사 접근은 선명하게 갈렸다. 삼성전자는 HBM4에 10나노 6세대(1c) D램과 하이브리드 구리 본딩 기술을 적용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성능과 집적도를 동시에 끌어올렸다는 설명이다. 기본이 되는 D램 성능을 높여 고속·대용량 데이터 전송 환경에서 전력 효율과 발열 특성을 개선하겠다는 전략이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장 부사장은 "동작 속도 11.7Gbps의 최고 성능 제품을 재설계 없이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이미 검증된 10나노 5세대(1b) D램과 양산 안정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회사는 "HBM4는 기존 1b 공정 기반으로도 고객 요구 성능을 구현했다"고 밝혔다. 공정 미세화보다 수율·양산 경험에 무게를 뒀다. 독자 패키징 기술인 MR-MUF*를 적용, HBM3E 12단과 유사한 수준의 양산성을 확보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HBM 등 적층 과정에서 칩 사이 공간을 한 번에 몰딩하는 패키징 기술. 열과 압력을 이용해 수지를 균일하게 채워 적층 안정성과 내구성을 높이는 것이 특징. 대량 양산에 유리해 수율과 생산성을 확보하는 데 강점.
HBM4 비중 확대…경쟁 구도 재편
시설투자 전략에서도 온도 차가 감지된다. 삼성전자는 AI 수요 장기화를 전제로 선제적 인프라 확보에 방점을 찍었다. 올해 시설투자를 전년 대비 큰 폭으로 늘리고 이미 확보한 신규 팹과 클린룸을 중심으로 설비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SK하이닉스는 매출 대비 시설투자 비중을 30% 중반 수준으로 유지하겠다는 기조를 재확인했다. 수요 가시성과 투자 효율성을 우선하겠다는 판단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술 우선 전략'과 '양산 우선 전략'의 충돌로 해석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같은 10나노급 공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공정 세대 차이가 결정적 우위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며 "각자가 가진 강점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삼성은 성능을 공격적으로 끌어올린 쪽이고 SK하이닉스는 HBM3와 HBM3E를 대량 생산해온 경험이 있어 생산성 측면에서 분명한 강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강조하는 '재설계 없는 통과'의 이면도 짚었다. 반도체 공정 특성상 성능을 공격적으로 높일수록 수율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삼성은 그간 HBM 주도권을 내준 상황이라 성능을 강화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남은 과제는 그 성능을 얼마나 안정적인 수율로 끌어올릴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부연했다.
HBM4 초기 경쟁의 관건으로는 '확장 능력'을 꼽았다. 물량을 키우기 위해선 무엇보다 안정적인 수율이 전제돼야 하고 수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급 확대 자체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맥락서 "당분간은 양산 경험을 축적해 온 SK하이닉스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다만 향후 HBM4 시장의 주도권 역시 특정 고객 한 곳이 아니라 추가 고객을 얼마나 확보하고 그 물량을 얼마나 빠르게 키울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릴 것으로 봤다.
한편 업계는 HBM4 초기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절반 안팎의 점유율을 유지하되 삼성전자가 30%대 비중을 확보하며 경쟁 구도가 한층 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HBM3E 세대에서 SK하이닉스가 초반 물량을 사실상 독점했던 것과 달리 HBM4에선 복수 공급 체제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