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1년. 미국의 관세와 통상 정책은 예상보다 집요하고 강하게 작동해 왔다. 원칙·제도·규범보다 힘의 우위를 앞세운 압박이 반복됐고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산업은 여전히 협상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이미 타결된 합의조차 종착점이라기보다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출발점에 가깝다. 트럼프식 관세 정책의 성격과 그 이면의 협상 방식, 한국 정부와 기업이 마주한 구조적 불확실성을 짚어본다.[편집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겨냥한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 관세 압박이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직접 수출 비중만 보면 미국 의존도는 낮아 보이지만, 한국산 메모리가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들어가는 공급망 구조 탓에 결국 관세 부담이 국내 업계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다. 관세가 완제품 기준으로 확대될 경우 비용 전가는 불가피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미국 반도체 관세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는다"며 고율 관세가 불러올 미국 내 물가 상승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이 단기적인 물가 상승을 감수하고서라도 한국 기업의 생산 기지를 본토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적 의도와 우리 내부의 인프라 한계를 동시에 직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만 경유하는 K-메모리의 역설
업계에서는 현재 특정 품목에 적용된 25% 관세가 메모리 전반으로 확대될 경우 국내 기업이 감당해야 할 직·간접 비용이 연간 수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만약 러트닉 장관의 최근 경고대로 100% 관세가 현실화된다면 손실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 같은 압박의 실질적 본보기는 대만이다. 미국은 대만과 상호관세율을 낮추는 조건으로 2500억 달러 규모의 직접 투자를 약속받았다. 특히 공장 건설 중에는 생산능력의 2.5배, 완공 후에는 1.5배까지 관세를 면제해 주는 구체적인 쿼터를 설정하며 대만 기업들의 현지 투자를 강제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반도체 수출액은 1734억 달러로 이 중 대미 수출액은 전체의 7.9%인 138억 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대만으로 향한 반도체 수출은 약 350억 달러로, 대미 수출의 2.5배를 상회했다. 이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독특한 분업 구조가 만든 결과다. 한국에서 생산된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대만 TSMC로 건너가 엔비디아 등의 AI 가속기로 패키징된 뒤 최종 소비지인 미국으로 향하는 물량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얽히고설킨 공급망 구조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관세 압박이 한국 반도체의 급소를 겨냥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관세가 세수 확보 수단이 아닌 한국 기업의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지렛대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율 관세의 진짜 목표는 기업들이 관세를 회피하기 위해 미국 현지 투자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미국 내 생산을 늘려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번 관세 압박이 한국의 주력인 범용 메모리 시장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허 교수는 "현재 관세는 대만을 거치는 고사양 칩에 집중돼 직접적인 영향이 없지만 삼성전자가 탑인 D램 시장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며 "D램에까지 고관세가 부과되면 삼성전자 역시 이를 피하기 위해 미국 내 생산을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용인 대신 미국?
미국이 원산지 규정을 강화해 우회 수출 물량까지 관세 대상에 포함할 경우 리스크는 더욱 구체화된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서울대 명예교수)은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기존 합의를 무시하고 압박을 가할 경우 사실상 실질적인 방어막이 없는 상태"라며 "우회 물량까지 관세가 적용된다면 국내 기업이 감당해야 할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수 있다"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이 같은 투자 압박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공동화 우려로 이어진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지만 정작 전력과 용수 확보 등 인프라 난제에 가로막혀 있다.
김 단장은 "용인 산단은 전력 확보 등의 문제로 계획보다 가동이 늦어지고 있는 반면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자국 내 투자를 강력히 종용하고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 인프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바에야 용인에 지으려던 공장의 일부를 미국으로 돌리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생산 기지의 해외 이전은 일자리 감소와 인재 유출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김 단장은 "한국 인재들이 국내 공장 대신 미국 근무를 선호하게 되면 우리 젊은 세대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국내 산업은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며 "미국 투자 유인과 국내 인프라 해결 사이에서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3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