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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사 5조 벌었다지만…속타는 '최고가격제 청구서'

  • 2026.05.06(수) 15:46

정부, 물가 부담에 8일부터 '5차 최고가격제' 결정
정유업계 누적 손실 3조 추산…보전 기준 놓고 충돌 
전문가 "시장 개입할수록 후속 혼선 불가피" 우려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정유 4사가 1분기 5조원대 영업이익을 거둘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업계 분위기는 밝지 않다.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로 내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데다 현재 실적 역시 유가 급등에 따른 일시적 '재고 효과'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최고가격제 손실 보전 기준을 둘러싸고 정부와 업계 간 충돌까지 격화, 논란은 단순 물가 정책을 넘어 정부의 시장 개입 방식 전반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정부가 오는 8일부터 5차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한다. 사진은 경기 지역의 주유소 모습./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정유사 덮친 이중 부담…가격 통제·재고 리스크

정부는 지난 3월부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 중이다. 미국·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국제유가와 석유제품 가격이 급등하자 소비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긴급 도입한 조치다. 정유사 공급가격의 상한을 정해 국내 가격 급등을 억제하는 대신 정유사 손실은 사후 정산 방식으로 보전해주는 구조다.

정부는 정유사들에 손실액 산정 자료를 6월 말까지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각사가 제출한 자료는 공인 회계법인 검증과 석유 전문가들로 구성된 '최고액 정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보전 규모가 확정된다.

쟁점은 '무엇을 손실로 인정할 것이냐'다. 정부는 회계 기준상 확인 가능한 물리적·회계적 원가만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기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자원안보실장도 최근 브리핑에서 "물리적인 원가 산정은 어려울 수 있지만 회계를 통한 원가 산정은 가능하다"며 원가 중심 정산 원칙을 재확인했다.

반면 정유업계는 국제 시장 가격 자체를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유업 특성상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경유·등유·항공유 등이 동시에 생산되는 '연산품 구조'라 특정 제품만의 원가를 따로 계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논리다.

이에 업계는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MOPS)과 국내 최고가격 간 차액을 기준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국제 시장에 수출하면 더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부 정책에 따라 국내 공급을 우선한 만큼, 포기한 이익까지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최근 국제 석유제품 시장에선 경유와 항공유 가격이 급등했다. 호르무즈 봉쇄 우려로 공급 불안이 커지면서 제품 가격이 원유 가격보다 더 빠르게 뛰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2월 배럴당 5.7달러에서 3월 16.5달러로 치솟았다. 손익분기점(4~5달러)을 3배 이상 웃도는 수준이다.

이 같은 흐름에 힘입어 국내 정유 4사는 올해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이 5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SK이노베이션은 2조원대, 에쓰오일은 1조원 안팎의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GS칼텍스와 HD현대오일뱅크 역시 대규모 흑자가 점쳐진다.

하지만 업계는 이번 실적을 두고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착시"라고 입을 모은다. 영업이익 상당 부분이 본질적인 수익성 개선보다 유가 급등에 따른 일시적 재고 효과에서 비롯됐다는 이유에서다.

정유사는 통상 수개월치 원유를 재고로 보유한 채 운영하는데, 유가 상승기에는 과거 저가에 들여온 원유가 현재의 고유가 기준 제품 가격에 반영되면서 장부상 이익이 급증한다.

문제는 그 이후다. 현재처럼 높은 가격에 원유를 계속 사들인 상태에서 전쟁 종식 등으로 유가가 하락하면 판매 가격은 떨어진다. 원가는 높게 유지돼 대규모 재고 손실이 한꺼번에 실적에 반영될 수 있다.

"시장 통제 대가 치르는 중"…부작용 경고도

실제 정유업은 공장을 멈출 수 없는 연속 공정 산업이다. 유가가 올라도 계속 원유를 매입해 저장해야 한다. 현재 정유사들은 중동산 원유를 대체하기 위해 더 높은 프리미엄을 주고 원유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이 끝나고 국제유가가 급락할 경우 현재 축적 중인 고가 원유 재고가 대규모 손실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최고가격제에 따른 내수 손실까지 겹치면서 업계 부담은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국내 정유 4사의 누적 손실 규모가 이미 3조원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주일당 손실 규모만 5000억원 안팎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 역시 부담이 적지 않다. 현재 손실 보전을 위해 편성된 예비비는 4조2000억원 규모다. 이미 상당 부분 소진이 예상되면서 재정 부담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기회이익까지 모두 보전할 경우 사실상 세금으로 정유사 수익을 메워주는 구조가 될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

최고가격제를 당장 종료하기도 쉽진 않다. 국제유가 상승이 국내 물가 전반으로 번지고 있어서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6%로 1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석유류 가격이 전년 동기 대비 21.9% 급등했다. 경유는 30.8%, 휘발유는 21.1% 각각 뛰었다. 국제항공료와 자동차 수리비, 세탁료 등 서비스 물가도 줄줄이 상승했다.

정부는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 조치가 없었다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를 넘어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해 국내 석유류 가격 상승 폭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에 정부는 오는 8일부터 5차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키로 했다. 국제유가 상승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제도를 성급히 종료할 경우 국내 기름값과 물가가 한꺼번에 급등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불안 요인은 여전하다. 시장에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30~140달러까지 치솟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미 글로벌 원유 재고는 빠르게 줄고 있다. 일부 외신은 "호르무즈 봉쇄로 글로벌 원유 재고가 위험 수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며 "5월 말이 유가 급등의 임계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결국 정부와 업계 모두 선택지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시장 가격 기준으로 보전하면 재정 부담이 폭증, 원가 기준만 고수하면 정유사 반발과 공급 위축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일각선 원가와 시장 가격을 함께 반영하는 '혼합형 기준'이나 일정 수준까지만 보전하는 방식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이 단순 손실 보전 문제를 넘어 정부의 시장 개입 방식 자체에 대한 논쟁으로 번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비자 물가 안정은 중요하지만 특정 산업에 가격 제한을 가하는 방식은 시장 질서 측면에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서 후속 정산 기준과 손실 보전 문제까지 모두 떠안게 된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손실 보전 기준을 둘러싼 충돌 역시 시장 개입의 후유증"이라며 "시장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면서 나타난 혼선에 가깝고, 당초 제도 설계 단계에서 후속 보전 문제까지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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