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1년. 미국의 관세와 통상 정책은 예상보다 집요하고 강하게 작동해 왔다. 원칙·제도·규범보다 힘의 우위를 앞세운 압박이 반복됐고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산업은 여전히 협상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이미 타결된 합의조차 종착점이라기보다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출발점에 가깝다. 트럼프식 관세 정책의 성격과 그 이면의 협상 방식, 한국 정부와 기업이 마주한 구조적 불확실성을 짚어본다.[편집자]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적법성을 심리 중인 미국 연방대법원이 장고를 이어가고 있다. 당초 위헌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며 관세 환급을 노린 줄소송까지 잇따랐지만, 판결 시점이 연거푸 미뤄지면서 법리 판단을 넘어선 정치적 고려가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 산업계도 연방대법원 판단이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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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외피만 바뀌나
업계에선 "어떤 결론이 나오든 큰 틀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우세하다. 상호관세가 합헌으로 유지되면 관세 체계는 현상 유지를 택할 가능성이 크고, 위헌 판단이 나오더라도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무역법 301조 등 다른 법적 수단을 동원해 관세를 재부과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관세의 법적 외피만 바뀔 뿐 압박 기조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김흥규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미중정책연구소 소장)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미국이 가진 시장 규모를 국가 권력의 또 다른 축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군사력이나 외교 압박 대신 세계 각국이 반드시 접근해야 하는 미국 시장을 지렛대로 삼아 자금을 끌어들이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국가 부채가 급증한 미국으로서는 내부 개혁이나 증세로 재원을 마련하기 어렵고 그 부담을 관세를 통해 해외로 이전하는 선택을 했다는 진단이다.
미국 연방정부의 국가부채는 올해 초 기준 약 38조500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이후 1년 동안에만 부채가 2조2500억 달러가량 늘었다. 재정 긴축과 부채 감축을 공언했으나, 감세 기조가 유지된 가운데 국방비·사회보장 지출과 국채 이자 비용이 동시에 증가하면서 부채 확대 흐름이 오히려 가팔라졌다는 평가다. 미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연방정부의 순이자 비용은 현재 GDP의 3.2% 수준이다. 향후 30년 내 5% 이상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김 교수는 설령 연방대법원이 상호관세를 위헌으로 판단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접을 가능성은 낮다고 진단했다. 기존 규범을 비켜 가는 방식으로라도 압박을 이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 상황을 두고 "통상에서 규칙은 뒷전으로 밀리고 힘이 기준이 되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재정 압박 속 관세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미국이지만 실제 부담의 상당 부분은 다시 미국 경제로 돌아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독일 킬세계경제연구소가 2500만건의 글로벌 무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관세 비용 가운데 외국 수출업체가 흡수한 비중은 4%에 그쳤고 나머지 96%는 미국 수입업체와 소비자에게 전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관세가 '외국에 매기는 세금'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실질적으로는 미국 기업과 가계가 부담하는 소비세에 가깝다는 의미다.
'위헌'도 반갑지 않은 까닭
관세 부담이 이미 미국 경제 내부로 흡수된 구조에선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단조차 정책 방향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이 위헌 판단을 내리더라도 관세가 자동 철회되거나 즉각 환급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연방대법원의 결론이 전면 합헌이나 전면 위헌으로 갈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1·2심 판단과 정치적 파장을 함께 감안할 경우 일부 조항만 문제 삼는 '부분 위헌' 또는 '부분 합헌' 형태의 절충적 판단이 나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허 교수는 "이미 징수한 관세에 대해 소급 환급 의무를 인정하지 않거나 이를 유예하는 방식의 판단이 나올 수 있다"며 "관세를 돌려받으려면 기업이 개별적으로 행정 절차를 밟아야 하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 행정부는 오히려 환급 절차를 충분히 까다롭게 설계할 여지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환급 국면이 열리더라도 기업이 체감하는 변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실제 관세 부담은 가격 조정 과정에서 수출기업과 수입업체, 유통 단계 등으로 분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허 교수는 "누가 얼마를 부담했는지를 사후적으로 가려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며 "환급 대상을 둘러싼 행정적 혼선도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 속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를 다시 협상 테이블 위로 끌어올렸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모든 메모리 생산 기업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라"며 선택지를 압축했다. 관세를 앞세운 투자 압박이 노골화된 장면이다.
업계는 상호관세의 합헌 여부보다 판결 이후 전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상호관세가 무효로 판단될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가장 손쉽게 꺼낼 수 있는 대안은 무역확장법 232조다. 반도체를 비롯해 의약품·핵심 광물·산업기계 등 이미 조사가 진행 중인 품목들이 연쇄적으로 관세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 교수는 "동맹국들은 불편함과 불만을 안고 있으면서도 미국 시장과 안보를 동시에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결국 일정 수준에서는 미국의 요구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갈등은 이어지겠지만 동맹의 하한선은 지키는 선에서 순응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허 교수도 "현 시점에서 정부나 기업이 선제적으로 방향을 정하기는 쉽지 않다"며 "판결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에 나설지를 지켜보면서 속도와 수위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시리즈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