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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커스터디(수탁)사업은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를 고대했던 곳 중 하나다. 커스터디는 제3자가 가상자산을 안전하게 보관·관리해주는 서비스다. 해킹 등의 피해를 막고 가상자산의 도난과 분실 위험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서비스의 특성상 개인투자자의 커스터디 수요는 사실상 적고, 대부분의 주요 고객이 법인·기관투자자다.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으로는 '코인베이스 커스터디', '비트고', '앵커리지 디지털'이 꼽힌다. 이들 기업은 핵심 서비스인 커스터디 외에 단기 파이낸싱, 디파이 서비스, 투자상품 출시 등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중 코인베이스 커스터디의 경우 비트코인 현물 ETF(상장지수펀드)가 허용되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반면 국내 커스터디 시장은 수년간 정체된 상태였다. 가상자산시장이 개인투자자에게만 열려 있다보니, B2B(기업간거래)가 대부분인 커스터디 사업은 성장하지 못했다. 주로 가상자산을 발행하는 재단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인 영업이 대부분이었다.
커스터디 기업들은 단계적으로나마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가 허용되면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커스터디 기업 관계자는 "정부의 로드맵이 발표된 후 매일 다수의 상장사로부터 연락이 오고 있다"면서 "법인의 투자 허용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벌써 커스터디 계약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귀띔했다.
DSRV랩스 서비스 시작…비트고는 아직
'한국판' 코인베이스 커스터디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가 자회사를 세워 커스터디 사업에 진출해 성과를 거뒀다. 반면 한국은 금융당국이 거래소 위주로 재편된 시장 구조를 바꾸고자 거래소의 권한을 세분화해 쪼개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커스터디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한국디지털에셋(KODA, 코다)과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 케이닥)이 일찌감치 가상자산사업자(VASP) 자격을 취득했다. 코다는 KB국민은행과 블록체인 투자사 해시드, 해치랩스가 함께 세운 법인이며, 케이닥은 가상자산거래소 코빗과 신한은행이 설립했다. 이들은 이미 재단 위주로 가상자산을 위탁한 경험이 있는데다, 주주인 시중은행들과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자체 커스터디 플랫폼 '카본'을 운영하는 인피닛블록을 비롯해 디에스알브이랩스(DSRV랩스), 비댁스 등 후발주자도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DSRV랩스는 최근 커스터디 서비스 운영과 관련해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본인증을 취득했다. 비댁스 또한 우리은행과 협력을 통해 커스터디 사업을 확장 중이다.
글로벌 커스터디 기업 비트고도 하나금융, SK텔레콤과 손잡고 국내시장 진출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비트고의 경우 금융당국이 해외 가상자산기업에 쉽사리 VASP 자격을 내주지 않는 점이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감독규정을 개정해 가상자산사업자의 대주주 현황을 꼼꼼히 따지고 있다. 비트고가 지난해 4월 국내에 설립한 비트고코리아의 경우 지분의 절반 이상을 본사인 비트고가 보유 중이다.
고팍스, 크립토닷컴의 사례로 볼 때 외국인 임원도 VASP 심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현재 비트고코리아 이사회 5명 중 3명이 외국인으로 구성돼 있다. 비트고 아태지역 대표를 겸하는 이영로 대표, 사내이사를 맡고 있는 존 베일러 마이어스와 첸빙광 모두 미국 국적이다. 가상자산업계 한 관게자는 "아직 ISMS도 취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시장 진입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기회 확장 환영…자금난은 숙제
커스터디 기업 외에도 법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상자산 B2B 기업들도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법인을 대상으로 가상자산 컨설팅, 중개 플랫폼 서비스, 자산관리 등 다방면으로 사업 기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가상자산이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회계·세무 서비스, 자금세탁방지(AML) 수요도 늘어날 전망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달 VASP 신고 수리를 마친 해피블록이다. 해피블록은 법인에 특화된 가상자산 전문 중개회사로, 가상자산 금융 플랫폼 '바우맨'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말 VASP 자격을 취득한 웨이브릿지도 법인을 대상으로 가상자산 교환·중개 플랫폼 '돌핀'을 서비스하고 있다.
다만 대형 가상자산거래소를 빼면 상당수 중소 VASP가 실명계좌 발급 대상에서 제외된 것에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용역 대가로 받은 가상자산을 내다팔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진석 코다 대표는 "단계적으로나마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를 허용한 것은 반갑지만, 밸리데이터(검증인)나 스테이킹(예치), 블록체인 컨설팅 기업 등은 가상자산을 현금화할 수 없어 자금난을 겪고 있다"면서 "단계적으로 실명계좌발급을 허용할 때 이들 기업도 포함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