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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고액권 규제

  • 2014.02.03(월) 10:25

지폐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채무증서(bank note)다. 행정부가 발행하는 채무증서(국채, treasury note)와 달리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에는 지폐를 보유하는 것보다 은행에 예금하는 것이 유리하다. 예금보장한도를 넘어서는 대규모 여유자금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자가 은행보다 좀 낮더라도 국채를 사는 것이 안전하고 이롭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가 정상적인 상황인 경우에나 적합한 상식이다.

 

만약 지금과 같이 이자율이 지극히 낮은 시기에는 현찰보유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극히 제한된다. 현찰화폐는 채권이나 은행예금 등과 달리 익명성이 완전히 보장된다.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만 하게 되면 세금을 피할 수도 있다. 현금을 쌓아두는데 따르는 각종 비용(금고 구입, 경비원 고용 등)을 감안하더라도 현금 축장은 나름의 이익이 상당하다.

 

현찰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다지만, 달리 표현하자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0%의 확정 이자율을 지급하는 증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만약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상황이라면 현찰은 플러스의 실질 이자율을 지급하는 매우 유용한 재산보관 수단이자 투자수단이 된다. 따라서 디플레이션 상태에서는 현금을 보유하고자 하는 유인이 더 높아진다.

 

이런 시기에 만약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마이너스로 인하한다면 현금 축장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은행의 예금금리 역시 마이너스로 떨어져 예금자는 보관료 형식의 비용(마이너스 이자)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예금을 인출해 버리면 대출해줄 돈이 은행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기존 대출도 앞다퉈 회수해야만 한다. 1930년대초의 대공황이나 마찬가지다.

 

기준금리를 제로(0) 밑으로는 더 내릴 수 없는 '제로금리의 하한 문제(zero lower bound problem)'는 이처럼 현찰에 제공되는 '0%의 이자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금융위기 발발 직후부터 서구의 학계에서는 현찰의 이자율을 마이너스로 인하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통화정책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시티그룹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윌럼 뷰이터가 대표적인 논자(論者)다. 최근에는 미시간대학의 마일스 킴볼 교수가 보다 정치한 구도로 구상을 가다듬었다.

 

대략의 구상은 이렇다. 현금의 0% 이자율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현금을 없애는 것이다. 그 뒤에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마이너스로 떨어뜨려도 현금을 축장할 방법이 없다. 모든 돈은 은행에 그대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융 중개기능은 상실되지 않는다. 대신 경제주체들의 지출은 대폭 늘어날 것이다. 보관료를 무느니 차라리 뭐라도 사는 게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도 크게 증가할 것이다. 돈을 빌려 쓴 대가로 이자를 지불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총수요와 통화량이 급팽창하면서 생산활동과 인플레이션이 신속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찰화폐(지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많은 반발이 있을 것이다. 모든 거래를 전자화폐(신용카드나 인터넷 뱅킹 등)로만 이뤄지도록 강제한다면 불편이 매우 커질 것이며,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현찰에 마이너스 이자를 매기자는 아이디어가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나왔다. 현찰을 은행에 예금할 때와 찾을 때에는 소정의 수수료를 지불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현찰에 대한 마이너스 이자율을 기준금리보다 더 낮게 적용한다면, 예를 들어 기준금리가 -1%일때 현찰에는 -2%의 이자율을 부과한다면, 설사 은행예금 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더라도 예금인출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현찰보유에 따르는 불이익이 은행 예금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기준금리는 제로 수준이다. 현금보유에 대한 규제를 하지 않는 한 더 내릴 여지가 없다. 유로존 역시 기준금리가 0.25%에 불과하다. 더 내린다고 해봐야 시늉만 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디플레이션 압력이 심화되고 실질 이자율을 대폭 인하하는 정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면 화폐개혁을 방불케 하는 최근의 아이디어가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기준금리는 2.50%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아직 상당한 여유가 있다. 그러나 최근 해외에서 논의되는 현찰화폐 규제 아이디어는 우리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

 

필자는 지난해 12월23일자 칼럼에서 예금인출 사태를 방불케 하는 우리나라의 현찰화폐 급증 현상을 거론하면서 "이 같은 기현상의 배경에는 우리에게 내재돼 있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현상은 5만원권 고액 지표의 발행과 관련이 있다. 상당부분은 자기앞수표를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역시 상당부분은 '문제 있는' 동기가 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지하경제다.

 

보통사람들에게는 5만원권이 큰 소용이 없다. 단지 지갑을 좀 얇게 해줄 뿐이다. 하지만 은행지점의 시재가 동날 정도로 거액의 고액권을 인출해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적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탈세나 뇌물, 또는 여타 불법 범죄행위와 관련된 거래를 의심할 소지가 있다. 요즘처럼 각종 전자이체가 용이한 시대에 그렇게 많은 현찰화폐가 소용되는 거래가 얼마나 흔할까.

 

우리나라 역시 물가와 금리가 많이 떨어졌다지만 여전히 현찰 보유에 따르는 기회비용은 작지 않다. 그러나 증여세, 소득세는 물론이고 심지어 부가가치세율과 비교하더라도 그 기회비용이란 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계좌추적에 따르는 범죄적발 위험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의 기회비용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서구에서 거론되고 있는 방안은 우리에게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고액권 교환에 수수료를 매기는 것이다.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해 본 큰 골격은 이렇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로 하여금 고객과의 고액권 교환거래 기록을 실명으로 작성해 유지하도록 규제한다. 특정 금액을 초과하는 고액권 인출과 입금에 대해서는 당국이 정한 수수료를 걷도록 한다. 거액 고액권 거래에 부과되는 경제적 불이익은 정책효과가 발생할 만큼 ‘충분’해야 할 것이다. 금융회사들이 그 거래주체의 명단과 내역을 당국에 보고하는 것은 물론이다. 자기앞수표에 대해서도 동일한 규제가 적용돼야 할 것이다.

 

필자는 과거에 신용카드 수수료에 관한 문제를 지적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신용카드 거래 수수료를 고객에게 전가하지 못하도록 한 현행 법률이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거래를 제한하고 신용카드 회사들에게 부당한 과점이익을 보장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예를 들어 총 2만원의 밥값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고객에게는 식당 주인이 카드 수수료에 해당하는 할인 혜택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하면 영세상인들의 수수료 부담을 자연스럽게 덜어줄 수 있고 서민들의 생활비용도 절감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이 주장은 오늘의 주장과 외견상 상충하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용카드를 대신해 사용하는 현찰화폐는 소액에 불과하다. 거액의 고액화폐 교환을 경제적으로 규제하는 방안은 일상 경제활동에서의 현금거래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골격에 불과하다. 선의의 피해나 불편이 발생하지 않도록 실행 준비 과정에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규제의 취지가 훼손돼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은행으로서는 고액화폐로 유통되던 본원통화가 지급준비금으로 대량 유입됨에 따라 상당한 환수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비용은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데 따르는 국민경제의 이익에 비해 미미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불법행위를 (본의 아니게) 조장해서 이익을 얻는다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런 이익은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는 것이 옳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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