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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으로부터의 출구전략

  • 2014.02.17(월) 11:34

"건설적 모호성(constructive ambiguity)" 또는 "창의적 모호성(creative ambiguity)" 혹은 "Fed speak" 등의 용어는 모두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당대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지칭한다. 때로는 이 용어 앞에 "art of"란 수식이 붙어 "건설적 모호성의 예술"이라고 찬양되기도 한다.

 

"A같기도 하고 B같기도 하다"는 식으로 들리는 이 모호성은 보통 "A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한편으로 B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는 화법을 통해 구사된다.

 

예를 들어 지난 2001년 2월 상원 반기보고에서 그린스펀 의장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FOMC 위원들은 대체로 올해 전체로 봐서 상당한 경기 둔화를 전망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전망은 동시에 불균형해소(rebalancing) 과정이 종료된 뒤에는 경제활동이 다시 강화될 것이란 예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경제가 좋아진다는 뜻인가, 아니면 좋지 않아진다는 얘기인가. 아마도 그린스펀은 어떠한 방향으로도 신호를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린스펀은 두 개의 신문이 자신의 의회보고 발언을 정반대의 헤드라인으로 각각 뽑은 걸 보고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해냈다고 여겼다.

 

그린스펀은 퇴임 뒤인 지난 2007년 CN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나오는 걸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언어를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나에게 한 어떤 질문에 대해 내가 대답하기를 원치 않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겠다.' 혹은 '노코멘트가 내 답변이다'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보통 네가지 혹은 다섯가지 문장을 늘어 놓는데 그 문장은 갈 수록 애매모호해지게 된다. 그러면 국회의원은 어쨌든 내가 답변을 했다고 간주하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그린스펀은 왜 자신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지난 2003년 8월 잭슨홀 연설이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키워드는 바로 '불확실성'이다. 연준의 화법이나 통화정책이 불확실한게 아니라 통화정책이 다루고자 하는 환경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경제라는게 연준 모델이 예측한 것과 전혀 다르게 전개될 위험이 다분하고, 계량하기 어려운 불확실성도 높으며, 연준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까지 존재하는데, 어찌 'A'라고 딱 부러지게 정책을 단언할 수 있겠느냐는 게 그린스펀의 생각이었다. 특히 닷컴버블 붕괴처럼 경제에 큰 충격이 미쳐진 뒤에는 예측모델에 의존하기가 더욱 더 어렵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그린스펀 당대의 통화정책 '모호성'은 연준 지식의 '불완전성'을 인정한 결과였다. 좋게 보자면, 대자연 앞에서의 겸손한 태도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동시에 연준 통화정책의 '재량성'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자유 재량적(dicretionary)' 정책이란 어떤 규칙에 의거해 기계적으로 정책을 수행하는 '준칙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정확한 예측이 불가하게 급변동하는 환경에서는 연준이 자신의 손발을 스스로 묶지 말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린스펀의 생각이었다. 이는 중앙은행이 모든 경제현상에 대응해야 하며 잘 대응할 수 있다는 판단을 기저에 깔고 있다. 대자연 앞에 겸손했던 불가지론은 어느새 오만한 전능주의(全能主義)로 전개되는 역설을 낳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국민들은 알 필요가 없다'는 탈(脫)민주적 독립주의로까지 진화한다. 물론 이에 대해 그린스펀은 시장이 연준의 커뮤니케이션에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반면, 후임자인 벤 버냉키 의장의 통화정책과 커뮤니케이션은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핵심 덕목으로 삼았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에는 이러한 전략에 더욱 큰 비중을 두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적어도 오는 2015년 6월말까지는 현행 제로금리를 계속 유지한다"고 했던 포워드 가이던스를 꼽을 수 있다.

 

버냉키 통화정책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어찌 보면 금융위기 이후 경제환경의 '확실성'과도 관련이 있다.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경제는 너무나도 나빴으며, 적어도 특정한 칼렌다 날짜상의 시기까지는 그러한 난국이 지속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가시성은 차츰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제로금리 유지 시한의 기준이 '실업률 6.5%'로 바뀌면서 칼렌다 날짜가 명확해지지 않더니, 이제는 '실업률이 6.5% 아래로 떨어진 뒤에도 한참 동안(well past)'이라는 기준이 가미되면서 더욱 모호해졌다. 

 

'정량적(quantitative)' 기준에서 '정성적(qualitative)' 기준으로의 변경은 제로금리 유지시한이 연준의 재량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장은 때때로 '언제 금리인상 커뮤니케이션이 등장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임스 불라드 세인트루이스 연준 총재는 최근 "포워드 가이던스는 더욱 정성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경제환경이 덜 확실해졌음을 의미한다. 즉, 경제가 누가 보더라도 아주 나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진, 보다 개선된 경제전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연준 통화정책이 모호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재닛 옐런 신임 의장이 정작 최근 의회보고에서는 이중적인 논법으로 일관한 것이나, 영국의 중앙은행이 최근 포워드 가이던스를 극히 모호한 내용으로 전면 개편한 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버냉키 당대의 통화정책이 항상 예측 가능성을 제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제3차 양적완화 정책이었다. 기존의 QE1,2와 달리 QE3는 '기한을 정하지 않은 채' 도입됐다.

 

연준이 제시한 QE3 유지시한 가이던스는 '고용시장 회복전망이 상당히 개선될 때까지'로 모호하고 정성적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버냉키 의장은 '전대미문의 통화정책 수단 동원에 따르는 비용과 효익을 연준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성적이고 재량적 정책은 필연적으로 다시 정량적이고 준칙주의적인 출구전략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환경의 전망이, 정책의 효익과 비용이 보다 뚜렷하게 파악돼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출구전략의 충격은 매우 클 수 있다. 지난해 5~6월 버냉키 의장이 '연내 테이퍼를 개시해 2014년 상반기말에는 QE를 종료할 것'이라고 제시한 뒤로 금융시장은 큰 혼란을 겪었다.

 

따라서 '실업률이 6.5% 아래로 떨어진 뒤 한참 동안, 특히 물가상승률 전망이 목표치(2.0%)를 믿도는 동안에는' 계속 제공될 제로금리 역시, 언젠가는 보다 정량적인 기준으로 뚜렷하게 바뀐 가이던스를 통해 출구를 향하게 될 것이다. 이는 경제회복 전망이 그만큼 더 뚜렷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지만, 지난해 테이퍼 소동에서 경험했듯이 그 전환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가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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