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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위기는 펀드런(fund run)에서 비롯될 수도"

  • 2014.05.14(수) 09:38

'유동성'이란 용어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의 경우에서 쓰인다. 재무적으로는 현금 또는 매우 간편하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유동성이라고 부른다. 거시경제적으로는 대체로 중앙은행이 은행시스템에 제공하는 통화(지급준비금)를 지칭한다.

 

금융시장에서 사용하는 '유동성'이란 용어는 다른 뜻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물량을, 원하는 가격에, 빠른 시간 안에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을 금융시장에서는 "유동성이 풍부하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팔자와 사자의 호가 차이가 매우 작고, 대기 중인 매수 및 매도 가격대들 사이의 간격 역시 매우 촘촘하며, 각 호가 별로 대기물량이 매우 많은 경우라면 이 시장은 유동성이 풍부하다.

 

그 반대의, 유동성이 풍부하지 않은 시장은 투자자에게 매우 불리하다. 우리 주식시장에 상장된 한 종목의 호가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가는 8635원이다. 그러나 이 가격으로는 팔 수가 없다. 사자 호가는 8600원에 2주만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팔 수 있는 가격은 2만주 매수주문이 올려져 있는 8585원이다. 따라서 이 경우 현재가와 실제 매도가능 가격의 격차는 무려 0.6%에 달한다. 이 종목에 투자한 사람은 최소한 0.6%의 암묵적인 수수료를 추가로 지불해야만 보유종목을 현금화할 수 있다. 팔고자 하는 물량이 많다면 훨씬 더 큰 비용과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에서 거래를 할 때 이러한 의미에서의 '유동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금융시장에서의 유동성 문제는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상장펀드(ETF)를 보자. 원래 펀드는 고객이 금융회사에 직접 찾아가서 필요한 서류작업을 한 뒤에 거래하는, 그래서 유동성이 제법 떨어지는 상품이다. 하지만 ETF라는 상품이 발명되면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반주식을 거래하는 것과 똑같이 컴퓨터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가입과 인출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유동성이 고도로 높아지게 됐다. 특히 ETF 운용사들이 매우 활발하게 시장조성을 하고 있어서 상당수의 제대로 된 ETF들은 대형주식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높은 유동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더 많은 투자자들을 불러 모았고, 그래서 ETF의 유동성은 더욱 더 높아졌다.

 

그런데 ETF의 유동성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ETF가 편입하는 기초자산 시장이다. 특정 ETF의 유동성이 아무리 풍부해도 그 ETF가 투자하는 자산 자체의 유동성이 낮으면 본질적으로 그 ETF의 유동성도 낮다. 오히려 이러한 ETF의 경우는 유동성 위험이 더욱 크다. ETF시장과 운용자산 시장의 유동성 미스매칭이 유동성 문제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시장이 정상적일 때에는 이런 미스매칭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ETF 운용사들은 환매에 대비해 일정 수준의 '유동성(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버퍼로써 시장을 조성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에 무언가 충격이 가해져 환매가 이례적으로 집중되는 경우, 일종의 ETF 런(run)이 발생하는 때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미리 확보해 놓은 버퍼 이상으로 환매요구가 발생할 경우 운용사는 유동성이 낮은 시장에서 운용자산을 팔아 치울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레버리지드 론(leveraged loan) ETF가 이러한 우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95주 연속해서 약 2년간 오로지 순유입되기만 하던 레버리지드 론 펀드로의 자금흐름이 지난달 들어 순유출로 역전됐다. 레버리지드 론 펀드는 은행이 기업 인수합병(M&A) 또는 차입 인수(LBO) 자금으로 빌려준 대출을 사들여 운용하는 상품이다. 이 대출은 정크본드와 유사해서 본질적으로 위험도가 높지만 그만큼 금리를 많이 주기 때문에 큰 인기를 얻어왔다. 레버리지드 론은 기본적으로 변동금리를 제공하는데 지난해 금리급등 위험이 부각되면서 더욱 많은 자금을 끌어 모았다.

 

문제는, 레버리지드 론 펀드 붐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ETF는 유동성이 매우 높은 반면, 이 대출을 사고 파는 시장의 유동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데 있었다. 과거에는 이 대출을 매매하는 과정에 대형 은행들이 참여해 시장조성을 해주는 서비스를 해왔지만, 은행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그러한 윤활유조차도 미약해졌다.

 

따라서 지난달 자금인출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레버리지드 론 ETF의 순자산가치(NAV)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ETF의 가격은 크게 하락한 NAV보다도 낮게 형성되는 저평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투자자들은 일종의 패널티까지 물어가며 인출해야만 했던 것이다. 가격하락폭의 절대수준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런 유형의 ETF에 내재된 유동성 위험을 각성시키기에는 좋은 사례가 됐다.


다행히 이 시장의 긴장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잘 마무리됐다. 레버리지드 론 ETF 가격이 저평가되자 기관투자자들이 대거 저가매수에 나선 덕이다. 그 결과 레버리지드 론 펀드로의 자금 흐름도 정상화됐다. 4주만에 순유입이 이뤄졌다.

 

하지만 만약에 기관 투자자들에게도 똑같이 미치는 공통적인 충격이 가해졌더라면, 그래서 레버리지드 론 시장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더라면, 론 ETF의 순자산가치는 훨씬 큰 폭으로 하락했을 것이며, 투자자들은 순자산가치보다도 현저하게 더 낮은 가격에 ETF를 청산했어야 했을 것이며,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악순환을 불러 일으켜 시장의 안정성을 위협했을 수 있다.

 

유사한 현상은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테이퍼(양적완화 축소/종료)'를 선언했을 당시 이머징 마켓 채권시장에서 목격됐다. 개인과 기관투자자들 모두가 이머징마켓 채권시장에서 빠져나오려고 몰려들면서 유동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기초자산 시장이 급락 소용돌이에 빠졌고, 이는 전세계 실물경제에까지 엄청난 위협을 가했다.

지난 2월 뉴욕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프린스턴대학의 신현송 교수와 JP모건의 마이클 페롤리 수석 이코노미스트 등 연구팀은 제레미 스타인 연준 이사와 함께 이러한 위험을 지적하면서 앞으로의 금융위기는 과거와 같은 '과도한 레버리지'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펀드 런(fun run)'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러한 위험성이 반드시 '기초자산의 유동성이 부족한' ETF에만 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10년 5월6일의 이른바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 사태는 가장 유동성이 풍부한 뉴욕 주식시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최우량 30 종목만으로 구성된 다우지수의 경우 당시 단 몇 분 사이에 1000포인트 가까이 폭락하는 일종의 런(run)을 겪었다. 촉발은 한 펀드의 선물 매도헤지에서 비롯됐지만 이후에는 거대한 매도물결이 동시에 합류하면서 쓰나미를 만들었다. 금융위기 이후 ETF와 함께 시장의 중심에 등장한 고빈도매매(HFT)가 이 유동성 소멸을 야기한 핵심 역할을 한 것이다. HFT는 ETF 시스템 작동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아무리 유동성이 풍부한 시장이라 하더라도 금융위기 이후의 시장 메커니즘에서는 힘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2010년 플래시 크래시가 보여줬다.

 

이러한 유동성의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잠재위험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시장의 건전성 감독을 주도하고 있는 연준은 과거의 틀에 맞춘 레버리지 규제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2월 포럼에서 스타인 연준 이사는 새로 등장한 유동성 위험에 대응할 새로운 규제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규제를 아무리 신설해도 금융불안정 위험을 모두 예방할 수는 없으며, 결국 열쇠는 ‘덜 완화적인 통화정책’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스타인 이사의 생각은 연준 내부의 소수의견에 불과하다. 거품 우려를 제기하며 지난해 양적완화 축소, 종료 결정을 이끌어 냈던 스타인 이사는 자진해서 사직원을 내고 하버드대 교수직으로 이달 말 되돌아갈 예정이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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