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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과 돈(money)의 미래

  • 2014.04.28(월) 10:17

은행은 예금으로 받은 돈을 대출로 운용하는 회사다. 예금이 100만큼 들어 오면 지급준비금 - 아주 미미하다. – 을 따로 떼놓은 뒤 나머지 돈을 굴린다. 당연히 대출 이자율은 예금 이자율보다 높다. 그래서 은행은 그 차익으로 돈을 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은행의 비즈니스 구조다.

 

그런데 은행의 사업은 좀 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서 예금 100에서 지급준비금 1을 떼놓고 99를 빌려줬다고 치자. 이렇게 빌려준 돈 99는, 그것이 어디로 사용됐든 간에, 거의 모두 은행의 예금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면 은행의 예금잔액은 총 199로 늘어난다. 이렇게 돌아온 99의 예금 중에서 1%의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나머지 돈은 다시 대출로 운용된다. 이런 식으로 반복되면서 은행의 예금은 계속해서 증가한다. 이른바 승수효과다.

 

은행의 예금은, 설사 약정한 예치기간 중간에는 페널티를 물긴 해도,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화폐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은행의 예금은 '통화(money)'다. 그래서 통화량을 따질 때에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은행 예금잔액을 우선 집계한다. 앞서 논했듯이 이 예금 즉, 통화는 은행의 대출을 통해 창출된다. 따라서 은행은 대출을 이용해 통화를 창출하는 민간회사다.

 

그런데, 은행이 반드시 지급준비금을 떼놓고 나머지 돈만으로 통화를 창출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지급준비금을 헐어서 대출을 늘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지급준비금을 점검하는 시기에 맞춰 부족한 지준을 채워 넣는다. 이 때 중앙은행은 은행에게 부족한 지준을 빌려주는 역할을 한다. 중앙은행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적어도 지난 2006년 우리나라의 신용팽창기, 부동산 거품기 당시에 한국은행은 그 역할을 원하지 않았다.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부동산 대출을 늘리고, 그래서 통화가 급팽창하고, 집값이 폭등하고, 그래서 대출수요가 더욱 팽창하고, 통화 팽창과 집값 폭등의 악순환이 발생하던 때, 한국은행은 은행들의 통화창출을 막으려고 부심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당시 한국은행이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은행에게 지준을 메울 자금을 대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지준자금을 조달하는 콜시장의 금리는 폭등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들 대부분이 비슷한 식으로 대출을 초과 운용했기 때문에 콜시장의 자금수급은 '절대부족' 상태였고, 이 공백을 해소해줄 곳은 한국은행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 콜금리 목표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번 은행시스템에 돈을 대주는 화수분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같은 구조는 단지 부동산 붐만을 일으킨 게 아니라 외국계 은행 국내지점의 국내 채권거품 팽창과 원화가치의 거품 부풀리기를 지원하는 결과까지 낳았다.

 

필자는 지난 2007년 6월 팀원과 함께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여덟 편의 분석 시리즈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은행 내부에서도 똑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얼마 뒤 "통화정책의 대수술"이란 타이틀이 붙은 개선조치를 내놨다. 콜금리 목표제가 기준금리제로 바뀐 것도 그 때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의 본질은, 민간은행이 통화를 창출해 주기적으로 신용팽창과 거품을 일으켜 결국에는 붕괴로 귀결시키는 현대 은행제도에 있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전세계가 똑같이, 지금도 그대로 안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이다.

 

이러한 결함은 최근 들어 더욱 큰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신용이 팽창하는 시기에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어지간히 올리더라도 막을 수 없는 요원의 불길 같은 붐이 일어난다. 이 불길을 막으려면 기준금리를 실물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폭력적으로 올려야만 한다.

 

그러나 어떠한 중앙은행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특히 지금처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장기 저성장이 불가피해 보이는 시기에는 더욱 더 무기력하다. '영구적인 침체(secular stagnation)' 문제를 제기해 관심을 모았던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최근 "완전고용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달성하는 통화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실물경제를 저금리로 계속 지원한다면 필연적으로 거품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경제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은행이 통화를 자유롭게 창출하고, 중앙은행은 그 뒷돈을 대줄 수밖에 없는 현대 은행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은행의 통화창출 기능을 회수해야 한다"는 글을 썼다. 대출행위로 통화를 창출하는 기존의 은행기능은 중앙은행이 전담토록 하고, 은행은 단지 결제기능과 신탁운용 기능만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공황 당시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가 처음으로 제기했으며, 근래에도 다수의 학자들이 역설한 주장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금융의 거품과 붕괴가 반복되고 경기 진폭이 극대화되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를 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앙은행제도(독점적 화폐발행)의 도입이나 금본위제의 폐지에 견줄만한 혁명적 조치다. 엄청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변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틴 울프는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기억하시라. 다음 번 위기가 왔을 때 – 분명히 올 것이다. - 우리는 (이 제도를 도입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밑바닥을 다시 한 번 봐야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밑바닥을 볼 날이 분명히 올 거라고 믿고 있다. 물론 바닥을 본다고 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미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선택할 자유, 자유로운 거래,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옹호하지만, 통화창출의 자유는 반드시 엄격하게 규제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자유로운 거래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틴 울프의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도 문제는 또 남는다. 화폐발행뿐 아니라 통화창출의 권한까지 독점하게 될 중앙은행은 과연 누가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는 점이다. 흥선대원군 시대의 당백전 인플레이션은 민간은행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지 않은가. 반복되는 거품과 붕괴의 기본 틀은 중앙은행이 조장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앞으로 두 번의 금융위기를 더 겪은 이후에 우리는 '과거 민간은행이 통화를 창출하던 시절이 오히려 나았다'고 한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부터 '제대로' 준비를 해야 한다.

 

로렌스 서머스 전 장관의 경우는 '실물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가가 민간을 대신해 상당한 부분의 투자기능을 담당하게 되면 민간의 투자거품과 붕괴의 반복을 막을 수 있고, 자산시장 거품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의 긴축적 통화정책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역시 대공황 당시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주장했고, 이후 금융안정 이론의 대가인 하이먼 민스키가 특히 강조했던 아이디어다.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역시 보다 입체적인 논의를 통해 '제대로' 검토돼야 할 사안이다. 국가는 때로 민간보다 더욱 탐욕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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