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Chasm) 맞나요?"
최근 만난 배터리 회사 관계자는 전기차가 안 팔리는 이유를 단순히 캐즘 탓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캐즘은 혁신적 제품이 대중화되기 직전 겪는 일시적 정체를 말한다. 어느 순간부터 캐즘 탓에 전기차가 안 팔리고, 전기차가 안팔리니 배터리 회사가 적자가 난다고 믿고 있다.
낯설었던 '캐즘'이 배터리 업계에 대중화된 것은 2024년 1월쯤이다. 최윤호 삼성SDI 사장이 신년사에서 "2024년은 전기차 캐즘 진입과 글로벌 경기침체 지속으로 일시적 성장세 둔화"를 전망했고, 이후로 너도나도 캐즘을 쓰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캐즘 말 속엔 '지금은 일시적으로 정체됐지만 곧 풀릴 거야'란 들뜬 기대감이 담겨있다. 침체에 빠진 배터리 업계에 캐즘은 그럴싸한 변명거리이자 앞으로 좋아질 것이란 희망이었다.

하지만 캐즘 탓만할 수 있을까. 작년 전기차 시장을 보자. 지난해 전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약 1763만대로 전년 대비 26% 늘었다. 그 어디에도 캐즘을 찾아볼 수 없다.
성장 원동력은 중국이다. 지난해 중국 전기차가 질주했다. BYD는 413만7000대 팔아 1위를 지켰고 3위 지리그룹 138만6000천대, 4위 상하이자동차 101만8000대, 6위 창안자동차 69만4000대, 9위 체리자동차 52만대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2위 테슬라와 7위 현대차그룹은 역성장했다. 한국이 전기차 시장 정체 원인으로 캐즘 탓을 하고 있는 동안 중국 시장은 고속성장했다.
중국 배터리 업계도 실속을 챙겼다. 전세계 1위 배터리 회사인 CATL 작년 매출은 전년 대비 9.7% 감소한 3620억위안(70조7818억원)이었지만 순이익은 15% 늘어난 507억4000만위안(9조9196억원)을 기록했다. 작년 국내 배터리 3사의 당기순이익은 LG에너지솔루션 3386억원, 삼성SDI 5755억원, SK온 -2조617억원. 3사 합계 순이익은 마이너스다. 포스코퓨처엠, 에코프로비엠 등 배터리 소재사 처지도 마찬가지다.
최근 만난 배터리 소재 기업을 둔 그룹 관계자는 그룹 회장이 국내 배터리 회사의 부진의 원인이 캐즘 탓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국내 배터리 업계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캐즘이 아닌, 중국과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배터리 소재 분야에 투자를 이어갈지 고민이 깊어진 것이다.
CATL은 최근 2세대 나트륨이온 배터리 '낙스트라'(Naxtra)를 올해 하반기에 양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소금 배터리'로 불리는 이 제품은 가격이 싸다. 리튬 대신 나트륨을 넣어서다. 여기에 외부 충격에도 화재가 잘 나지 않아 안정적이다. 중국이 2세대 '소금 배터리'를 준비하는 동안 한국 배터리 회사는 개발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게 현실이다.
올해 1분기 삼성SDI는 4341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SK온) 영업손실도 2993억원에 이른다. LG에너지솔루션은 374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미국 보조금을 제외하면 적자다. 언제까지 캐즘 탓만 할 수 없다. 한국 배터리 업계가 침체된 원인은 중국과 경쟁에서 밀려서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언제까지 캐즘 탓만 하고 있을까. 캐즘이라는 희망고문을 버릴 때다. 병을 고치기 위해선 정확한 진단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