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국적항공사 대한항공을 운영하는 한진그룹은 지난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 순위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기업 위상에 걸맞지 않게 한진그룹을 둘러싼 잡음은 수년 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영면한 뒤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조 회장의 자녀 삼남매가 원만하게 경영권을 합의하는 듯 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삼남매 중 맏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남동생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독점적 경영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후 조원태 회장이 어머니 이명희 전 정석기업 고문과 격한 언쟁을 벌이면서 한진가(家)의 갈등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한진가는 지난해 10월 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조양호 회장 지분(1055만3258주, 17.84%)를 법정 상속비율로 나눴다. 이에 따라 현재 한진칼 지분구도는 ▲조원태(385만6002주, 6.52%) ▲조현아(384만261주, 6.43%) ▲조현민(383만1594주, 6.42%) ▲이명희(314만5437주, 5.31%) 등 유족들이 고르게 나눠가지고 있다.
직계 가족지분이 24.68%에 불과한 만큼 한진칼 지분 3.37%를 보유한 공익법인 3곳(정석인하학원·정석물류학술재단·일우재단)이 경영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총수일가가 지배해온 한진 공익법인
한진그룹을 대표하는 공익법인 정석인하학원은 1978년 만들어졌다. 이 재단의 원래 이름은 정석학원이었다. '정석'은 고 조양호 회장의 아버지이자 현 조원태 회장의 할아버지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아호(雅號)이다.
정석학원은 2013년 별개로 있던 인하학원과 통합해 정석인하학원으로 재탄생했다. 인하학원은 1952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출범한 곳이며, 1968년 현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로부터 2억원의 기금을 기증받았다. 이후 조중훈 회장이 인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한진-인하의 동반 관계가 시작됐다. 사실상 공익법인의 시작이 1968년인 셈이다.
현재 정석인하학원의 이사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지낸 현정택씨가 맡고 있다. 지난해 5월 조양호 회장이 별세하면서 공석이 된 자리를 메운 것이다. 현정택 이사장은 조양호 회장의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한진그룹에는 1991년 만들어진 문화 사업을 하는 일우재단, 2004년 설립한 학술·장학 중심의 정석물류학술재단도 있다.
일우재단은 고 조중훈 창업주의 사돈이자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의 부친 최현열 CY그룹 명예회장이 현금 3억3000만원을 출연해 설립됐다. 일우재단의 '일우(一宇)'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호(號)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우재단이 세간의 이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2018년이다.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명희 전 정석기업 고문이 불법으로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직원들에게 폭언을 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이명희 전 고문은 2009년부터 맡아왔던 일우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기존 일우재단 이사진 멤버였던 오치남 대림AF회장이었다.
정석물류학술재단은 대한항공과 조원태 회장의 할머니 고 김정일 여사가 현금과 주식을 출연해 설립했다. 대한항공은 현금 40억원을 출연했고 고 김정일 여사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정석기업 주식 9만6700주와 한진관광 주식 19만8000주 등 110억원 가량을 출연했다.
현재 정석물류학술재단의 이사장은 유경희 전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가 맡고 있다. 고 김정일 여사는 별세하기 전인 2016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 공익활동 저조…총수일가 기부금 인색
정석인하학원은 현재 인하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 인하대학교병원 등을 운영하며 교육 중심의 공익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세청 결산서류에 따르면 정석인하학원은 2018년 한 해 동안 공익사업에 3886억원을 지출했다. 전체 자산의 3분1 수준이다.
다른 연도와 비교해 2018년도 공익사업 지출액이 크게 늘었다. 2016년 장학금 지급 등 공익사업에 쓴 금액은 313억원, 2017년에는 265억원을 썼다. 2018년과 비교하면 약 15배 가량 공익목적사업 지출액이 늘어난 것이다.
다만 2018년 실질적으로 장학금 등 수혜자에게 지급하는 공익사업에 쓴 금액은 278억원이다.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금액은 인하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 등 학교의 설치 운영금액에 쓰였다. 회계 처리가 이전과 달라서 표면적 공익사업비가 늘어난 것이며, 장학금 등 순수 공익사업에 쓴 금액은 큰 변화가 없다.
일우재단은 2018년 9억6000만원을 해외 장학생 유치, 일우사진상 개최, 일우스페이스 전시 등에 사용했다. 정석물류학술재단은 7억원 가량을 물류분야 학술연구지원, 학술 토론회 개최에 썼다. 일우재단과 정석물류학술재단의 자산규모(각각 365억원, 603억원)와 비교하면 적은 금액이다.
한진그룹 총수일가의 3개 공익법인 기부 실적이 없는 점도 눈에 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국세청 결산서류를 종합한 결과, 5년 간 고 조양호 회장, 조원태 회장, 이명희 전 고문, 조현아 전 부사장, 조현민 전무 등의 기부내역이 없었다. 한진칼·한국공항 등 계열들이 정석인하학원에 기부한 현금, 미술작가들이 일우재단에 기증한 작품이 한진그룹 공익법인 기부의 전부였다.
# 공익법인, 총수일가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한진그룹 3개 공익법인에 대한 총수일가의 기부활동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들 공익법인을 총수일가가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활용한 전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조중훈 창업주가 2002년 타계 직전 보유하고 있던 대한항공 주식(472만5077주, 6.5%)과 ㈜한진 주식(45만2451주, 3.78%)을 당시 정석학원, 인하학원, 21세기한국연구재단(현 일우재단) 3개 공익법인에 무상 증여했다. 조양호 회장은 아버지의 공익법인 무상증여 이전부터 정석학원·인하학원·21세기한구연구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에도 아들인 조양호 회장에게 경영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증여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러한 흐름은 1세대와 2세대를 이어 3세대인 조원태 회장으로까지 어이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특히 조원태 회장은 누나 조현아 전 부사장과 현재 경영권 분쟁 중이며, 두 남매가 보유하고 있는 지주회사 한진칼의 지분 차이가 미미하다. 이 때문에 한진그룹 계열사 주식을 갖고 있는 공익법인 역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석인하학원, 일우재단, 정석물류학술재단 모두 그룹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정석인하학원은 ▲대한항공(260만866주, 2.74%) ▲한진칼(127만1403주, 2.15%) ▲㈜한진(47만5124주, 2.97%)를 갖고 있다. 일우재단은 ▲대한항공(19만1325주, 0.2%) ▲한진칼(9만2453주, 0.16%)을 보유하고 있다. 정석물류학술재단은 ▲정석기업(12만3115주, 9.99%) ▲대한항공(63만7118주, 1.06%) ▲한진칼(63만7118주, 1.06%)다. 3개 공익법인이 한진칼 주식 200만974주(3.37%)를 보유중이다.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구도는 현재 이명희 전 고문과 조현민 전무가 조원태 회장을 지지하고, KCGI(일명 강성부펀드)·반도건설이 조현아 전 부사장과 손을 잡아 '반(反)조원태'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다.
한진 공익법인 3곳의 주요 이사진을 살펴볼 때 조현아 전 부사장 편에 서긴 어려운 상황이다. 정석인하학원 비상임 이사에 조원태 회장이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이명희 전 고문이 10여년을 재직해 온 일우재단도 오랫동안 이사진으로 함께 일했던 인사가 이사장이다. 정석물류학술재단 비상임 이사로 재직 중인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도 조현아 전 부사장과 반대노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