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성사 여부가 안갯속에 빠졌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가 삼성물산 주식을 가진 투자자들에게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반대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혼전이 깊어지고 있다.
삼성은 엘리엇이 법원에 낸 합병안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이 지난 1일 기각되면서 승기를 먼저 쥐는 듯 했지만, 투자자들 의결권에 영향력이 적지 않은 ISS가 합병 반대 편의 손을 들어주면서 양측의 대결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결국 오는 17일 합병안을 다루는 주주총회 표대결에서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 그래픽 = 김용민 기자 |
◇ ISS "적정 합병비율 1대 0.95"
ISS는 3일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에 반대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통해 "두 회사의 합병이 한국법상 문제가 없다하더라도, 저평가된 삼성물산과 고평가된 제일모직의 조합은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현저하게 불리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는 자산가치가 큰 삼성물산의 주가가 상대적으로 낮고 제일모직의 주가가 높은 상황에서 1대 0.35로 결정된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엘리엇이 그동안 주장해온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의견이다. ISS는 1(제일모직)대 0.95(삼성물산)가 적정 합병 비율이라고 제시했다.
이에 앞서 지난 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김용대 수석부장판사)는 엘리엇이 합병 비율이 불공정하다는 주장과 함께 삼성물산 등을 상대로 낸 주총 소집 통지 및 결의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바 있다.
국내법상 삼성은 합병의 정당성을 확보했지만 주주의 의결권을 좌우할 경제적 논리 측면에서는 엘리엇이 세를 불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모양새다. 주총을 앞두고 벌이는 위임장 대결(proxy fight)에서 양측이 한번씩 공방을 주고받은 셈이다.
오는 17일 열릴 주총에서 지분 70% 가량이 의결권 행사에 참여할 경우 정할 경우 삼성은 합병 통과를 위해 47%를, 엘리엇은 합병 무산을 위해 23%를 각각 확보해야 각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 'D-14' 남은 2대 변수..'자사주 의결권·국민연금'
주총까지 남은 변수는 크게 볼 때 두 가지다. 하나는 합병 발표 후 KCC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의결권이 살아난 삼성물산 자사주에 대한 문제가 법정에 남아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분율 10.15%(주주명부 폐쇄일 기준)로 단일 주주 가운데 삼성물산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국민연금의 행보다.
법원은 엘리엇이 주총결의 가처분에 추가로 제기한 삼성물산의 자사주 전량(지분 5.76%) KCC에 매각 관련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아직까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주총 전까지 양측에 결론을 전달키로 한 상태다.
법원이 이 사안에서 엘리엇의 손을 들어 삼성물산이 KCC로 넘긴 자사주의 의결권 행사가 차단될 경우 삼성으로서는 타격이 크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 계열사 등(최대주주 등 14%)지분을 제외하고 가장 확실한 우군 지분을 잃는 격이기 때문이다.
의결권 대결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국민연금의 행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은 최근 SK C&C와 SK의 합병안에 대해서는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반대표를 행사했다. 삼성물산 합병 건에서도 엘리엇이나 ISS의 주장을 받아들여 반대 투표를 하거나 의결권을 포기할 경우 합병안은 부결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만 국민연금이 삼성의 합병 건에 반대표를 행사할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이 해외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는 모양새인데다, 부결시 단기적으로 주가 하락 리스크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말 현재 삼성물산 보유지분을 11.61%까지 늘린 상태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측에 주주친화 정책을 요구하고 삼성이 이에 부응한 것도 찬성 투표 관측에 무게를 싣는 부분이다. 삼성물산을 합병할 제일모직은 지난달 30일 기업설명회(IR)을 열어 주주권익위 신설, 배당성향 30%로 확대 등의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 삼성물산 김신 사장 美급파..엘리엇 파상공세
삼성물산은 합병 무산 위기감에 긴장의 고삐를 죄는 모양새다. 삼성은 이미 전방위적인 위임장 확보에 돌입한 상황이다. 최치훈 사장은 "유럽과 동남아 등지를 방문해 주주 설득작업을 진행해왔으며 앞으로도 필요한대로 찾아 다닐 것"이라고 지난 1일 밝힌 바 있다.
▲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이 1일 오전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사장단 회의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은 IR 직후 해외 기관투자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김 사장은 현지에서 다양한 투자자들을 만나 의결권 행사 성향을 파악하고 찬성 설득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사장은 2004년 영국 헤지펀드 헤르메스와의 공방 때도 전면에 나선 경험이 있다.
삼성물산은 최근 국내 소액주주들에게도 합병 설명자료와 함께 의결권 위임 서류를 우편으로 발송하고, 전화 등으로 직접 위임 권유 작업을 벌이고 있다.
반면 엘리엇은 주총 소집 금지 가처분이 기각된 것에 항고하는 한편, 삼성물산 이사진 교체 시도를 언급하고 국민연금의 동조를 호소하는 등 줄기차게 강공을 펴고 있다.
엘리엇은 이날 "모든 주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임시 주총을 통해 신선한 시각과 독립적 경륜을 갖춘 인재로 삼성물산 이사진을 교체하는 것도 요구할 수 있다"며 "합병이 실행되지 않는 경우 주주들은 삼성물산의 격에 맞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으로 진정한 주주가치 구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