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성사 여부가 오리무중이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가 합병에 부정적 의견을 냈고, 합병에 반대하는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 외에도 삼성SDI와 삼성화재 주식까지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의 합병 이슈뿐 아니라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까지 불확실성이 커지는 모습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오는 17일 열릴 주주총회에서의 표 대결이 관건이다. 주총에서 의결권을 가진 주식 70% 가량이 표결에 참여할 경우 합병 통과를 위해서는 47%, 합병 무산을 위해서는 23%의 지분이 확보돼야 한다. 삼성물산과 엘리엇이 각각 합병 성패를 이끌기 위해 세 불리기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남은 변수는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 외국인 투자자 '표심'
우선은 삼성물산의 외국인 투자자들이 합병안에 찬성할지, 엘리엇이 이끄는 반대편에 설지가 관전 포인트다.
삼성물산의 외국인 지분율은 주주명부폐쇄일(6월11일) 기준 33.6% 가량으로 추정된다. 엘리엇을 빼면 26%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엘리엇을 제외한 외국인 투자자 가운데 절반 가량이 반대표를 던지면 합병안은 부결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 그래픽 = 김용민 기자 |
ISS가 보고서에서 인용한 톰슨원 집계에 따르면 엘리엇 외에 ▲블랙록(2.0%) ▲디멘셔널(1.4%) ▲뱅가드(1.1%) ▲노르웨이중앙은행 투자운용그룹(1.0%) 등이 삼성물산 지분을 1% 이상 들고 있다. 여기엔 빠져 있지만 엘리엇과 공조 가능성이 있는 메이슨도 2.2%의 지분을 갖고 있다.
특히 엘리엇은 외국인 주주들을 중심으로 이미 상당 기간 설득작업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게다가 이들의 의결권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ISS가 합병 반대 표결을 권고한 것을 감안하면 합병 반대 쪽에 설 개연성이 높다.
다만 외국인 주주 가운데는 엘리엇처럼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인 주주도 있지만 절반 이상은 상장지수펀드(ETF) 등의 투자비중이 높은 인덱스 펀드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덱스펀드는 의결권 행사에 소극적이다.
ISS가 합병안 반대를 권고했지만 동시에 '합병 부결시 단기 주가하락 리스크'를 지적한 만큼 인덱스펀드들의 선택도 보유기간 등에 따라 갈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물산 역시 이런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최치훈, 김신 사장 등 최고위층이 미국과 유럽, 싱가포르, 홍콩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주주 설득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엘리엇을 제외한 외국인 투자자의 절반 이상을 삼성 측으로 끌어들이면 합병 반대표를 커트라인 아래로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 국민연금의 '캐스팅 보트'
삼성이 합병을 관철하기 위해선 해외투자자들을 찬성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국내 투자기관들의 표 이탈도 막아야 한다. 국내 기관은 총 21.2%의 삼성물산 지분을 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단일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은 합병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국민연금은 주주명부폐쇄일 기준 11.21%까지 지분율을 끌어올려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 또 국민연금의 찬반 선택 논리는 다른 기관이나 국내 소액 주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이번 사안을 내부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외부 전문가들이 포함된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위임할 것으로 알려졌다. 자체적으로 찬반을 선택해 밀어부치기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국민연금 의결권 전문위는 SK와 SK C&C 합병안에 대해서는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반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삼성물산 합병 건에 대해서도 반대나 의결권 포기 등 합병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자문기구인 ISS가 반대를 권고한 것도 부담이다.
다만 최근까지 움직임을 보면 찬성을 택할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삼성물산 측에 합병 후 주주가치 제고 방안 등을 요구하고, 이에 대해 제일모직-삼성물산 측으로부터 배당성향을 상향하고 주주권익(거버넌스)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답을 얻어내는 등 호흡을 맞추는 모양새를 보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합병 결정 후 삼성물산 지분을 꾸준히 지분을 늘린 것도 국민연금의 찬성 관측에 힘을 싣는다. 9% 대의 보유지분을 지난달 말 기준 11.6%까지 끌어올린 상황에서 합병이 부결돼 주가가 하락하면 적잖은 투자 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 KCC로 매각한 자사주 의결권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무산시키기 위해 제기한 2건의 가처분 소송에 대한 첫 심문이 열렸다. 사진은 이날 오전 법원에 출석하는 삼성물산 측 김용상 변호사(왼쪽)과 엘리엇의 법률 대리인 최영익 변호사(오른쪽). /이명근 기자 qwe123@ |
마지막으로는 엘리엇이 합병 반대 의사를 밝힌 뒤 삼성물산이 KCC로 넘긴 자사주(5.76%)가 의결권을 인정 받을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대부분 시나리오에서 이 지분은 이미 삼성측이 확보한 찬성표로 분류되지만 엘리엇은 이 지분에 대해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을 걸어 뒀고, 법원 역시 판단을 유보한 상태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제3자로 소유권이 옮겨지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삼성은 이를 통해 우호지분을 종전 14%에서 20% 가까이 늘린 것이다. 이를 두고 엘리엇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삼성물산과 이사진의 우호지분 확보를 위한 불법적 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과거 판례도 엇갈린다.
2003년 12월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 중이던 SK는 당시 보유한 자사주 583만주(지분 4.5%)를 제 3자인 산업·하나·신한은행 등 국내 금융기관 매각키로 했는데 나흘 뒤 소버린은 의결권 침해금지 가처분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지법은 이를 기각하고 자사주 매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반면 2006년 4월에는 대림통상 최대주주 이재우 회장이 우호주주에게 넘긴 자사주(11.1%)의 의결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서울서부지법 판결이 나왔다. 당시 법원은 "자기주식 처분이 주주평등 원칙에 반하고 주주의 회사지배에 대한 비례적 이익과 주식의 경제적 가치를 현저히 해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 법조계 관계자는 "자사주 매각의 합법성은 경영권의 적절한 방어행위 한계 내에 있느냐에 따라 갈리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엘리엇이나 이를 대리하는 넥서스 측도 주주가치 침해의 불법성 여지에 기대를 두고 가처분을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