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최근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는 루머에 휩싸이며 흔들리고 있다. 지난 주말 온라인상에서 '롯데그룹이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의 지라시가 확산하자 롯데그룹은 "사실무근"이라는 해명 공시를 내고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섰다.
하지만 재계 서열 6위의 롯데그룹이 온라인상의 풍문에 휘청일 정도였다는 건 그만큼 롯데그룹 위기설이 완전히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미 시장에서는 롯데그룹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롯데케미칼, 호텔롯데, 롯데쇼핑 등 주력 사업들이 모두 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차입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역시 지난 7월 VCM(옛 사장단회의)에서 재무건전성 관리 강화를 직접 거론할 정도였다.
잘나가던 케미칼마저
롯데그룹 재무 상태 악화의 주범은 롯데케미칼이다. 롯데케미칼은 원래 롯데그룹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계열사 중 하나다. 롯데그룹이 2022년 벌어들인 매출액 84조8000억원 중 33.8%가 롯데케미칼을 위시한 화학군에서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석유화학 업황의 다운 사이클이 2021년 하반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데다 고유가 상황이 겹치면서 기초화학 비중이 큰 롯데케미칼은 직격탄을 맞았다. 롯데케미칼은 2022년 연결 기준 7226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 전환했고 지난해에도 3331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올해엔 3분기까지 누적 영업손실이 6600억원까지 늘어났다.
여기에 롯데케미칼이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인수, 인도네시아 '라인 프로젝트' 등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재무 부담이 가중됐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의 총차입금에서 현금성자산을 제외한 순차입금은 2022년 말 3조991억원, 지난해 6조728억원에서 올 3분기 말 7조2789억원까지 증가했다. 차입금이 늘면서 롯데케미칼의 이자비용 역시 2022년 1499억원에서 2023년 3789억원으로 뛰었다. 올해 3분기까지의 누적 이자비용은 3197억원에 달한다
자산까지 공개
이런 상황에서 지난 21일 롯데케미칼 일부 회사채의 기한이익상실(EOD) 이슈까지 불거졌다. 롯데케미칼이 2013년 9월부터 2023년 3월까지 발행한 공모채 중 14개 회사채에는 '3개년 누적 평균EBITDA ÷ 이자비용'이 5배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특약 조항이 있다.
그런데 롯데케미칼의 실적 악화와 이자비용 증가 탓에 이 수치가 9월 말 현재 4.3배를 기록하면서 EOD 사유가 발생했다. EOD 사유가 발생하면 채권자는 EOD를 선언할 수 있고 채무자는 차입금을 조기 상환해야 한다. 이번에 EOD 사유가 발생한 회사채 규모는 약 2조원에 달한다. 갑작스럽게 차입금을 회수당한다면 실적과 재무 상태가 좋지 않은 롯데케미칼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롯데케미칼에 EOD 사유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롯데케미칼은 올 상반기에도 미즈호은행에서 빌린 차입금에 대한 재무 약정 조건을 지키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롯데케미칼의 해외 종속기업들이 차입금 재무 약정을 준수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이때는 모두 웨이버(재무 약정의 일시적 유예)를 획득하며 위기를 넘겼다.
자본시장에서는 이번에도 롯데케미칼 채권자가 EOD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현재 사채권자와 협의를 진행하면서 다음달 중 사채권자 집회를 열어 특약 사항을 조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롯데그룹 위기설이 파다한 탓에 이번 EOD 이슈는 전보다 과도한 우려를 불러왔다. 결국 롯데그룹은 같은날 이례적으로 그룹 자산 규모까지 공개하며 진화에 나섰다.
롯데그룹은 "이번 현안은 최근 석유화학 업황 침체로 인한 롯데케미칼의 수익성 저하로 인해 발생한 상황"이라며 "회사는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어 회사채 원리금 상환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10월 기준 롯데케미칼은 활용 가능한 예금 2조원을 포함, 가용 유동성 자금 총 4조원 상당을 보유하고 있다. 또 전체 롯데그룹의 10월 기준 총 자산은 139조원, 보유 주식 가치는 37조5000억원에 달한다. 그룹 전체 부동산 가치는 10월 평가 기준 56조원이며, 즉시 활용 가능한 가용 예금도 15조4000억원에 이른다. 2조원 가량의 롯데케미칼 회사채에 EOD 선언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끝나지 않은 위기
롯데그룹에 대한 우려는 과도할지 몰라도 여전히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롯데케미칼의 실적이 개선돼야 하지만 업황 회복에 대한 전망은 그리 좋지 않다.
롯데케미칼의 부진을 그룹의 또 다른 축인 롯데쇼핑과 호텔롯데가 막기에도 역부족이다. 롯데쇼핑은 올 3분기 누적 영업이익 3259억원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주력 사업인 백화점이 내수 부진 탓에 크게 부진하다는 점이 문제다. 호텔롯데 역시 면세점 부진이 길어지면서 3분기 누적 기준 적자로 돌아섰다.
이에 롯데그룹은 자금 조달과 재무구조 개선에 집중할 전망이다. 롯데케미칼은 해외 자회사 지분을 활용해 1조3000억원의 유동성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달 미국 내 EG(에틸렌글리콜) 생산법인인 손자회사 롯데케미칼 루이지애나(LCLA)의 지분 40%를 제3자 배정 유상증자 형태로 매각해 6626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인도네시아 종속회사인 롯데케미칼 인도네시아(LCI) 지분을 활용한 자금 조달 계획도 추진 중이다.
또 롯데케미칼은 최근 자산 경량화 차원에서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법인 롯데우베합성고무(LUSR) 청산도 결정했다. 이외에 롯데쇼핑은 중국 청두법인 매각 작업을 벌이고 있고 국내에서도 비효율 점포 자산을 유동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올해 초 신동빈 회장이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업을 앞으로도 몇 개 정도 매각해 갈 것"이라고 언급한 만큼 일부 사업의 매각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에서는 연간 영업이익 3000억원가량을 내는 알짜 회사 롯데렌탈이 매각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은 "외부 복수의 원매자로부터 롯데렌탈 지분 매각에 대한 제안을 받아 검토 중이나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는 없다"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계열사들과 원활한 협의를 통해 안정적 경영을 유지하고 필요시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해 재무 안정성 관리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며 "이번 EOD 현안과 관련해서는 롯데지주 중심으로 주 채권은행과 긴밀한 소통을 통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관리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