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정부에서 상속·증여세 분야를 담당하던 베테랑 서기관이 돌연 사표를 내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기업 회장에겐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향후 재산의 상속·증여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기 위해 현직 최고의 전문가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물려줄 재산의 규모가 워낙 상당하기 때문에 전직 공무원 한 사람에게 지급한 거액의 연봉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해당 기업 입장에서는 오히려 법 테두리 내에서 체계적인 상속·증여세 절세 플랜을 짤 수 있어 흡족한 반응이었다.
우리나라 현행 법(法) 체계를 감안할 때, 재벌가 입장에서 평생 일군 재산의 절반을 상속세로 내야 한다는 사실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내 힘으로 일군 재산을 세금은 가급적 줄이고, 가급적 원형에 가깝게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유능한 재무 인력을 총동원해 세금을 줄여볼 수도 있지만, 최고세율 50%가 주는 무게감은 도무지 피해갈 수 없다. 국세청이나 관세청, 검찰 등 관계당국에서도 재벌가의 재산 흐름을 주시하고 있어 세금 폭탄의 '안전핀'이 언제 뽑힐지 모르는 상황이다.
재계에서는 상속·증여세가 기업활동을 저해하고, 세수 확보(국세 대비 비중 2% 수준)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상속세 대신 자본이득세를 도입해 징벌적 성격을 해소하고, 기업승계를 원활하게 해달라는 주장이다. 과연 자본이득세는 상속세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 출처: 기획재정부 |
◇ 상속세의 유일한 대안
1970년대부터 상속세에 대한 회의론이 나타나면서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웨덴 등은 상속세를 폐지했다. 대신 자본이득세 형태로 재산의 이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도입됐다.
자본이득세는 현재 우리나라도 시행하고 있는 양도소득세와 유사한 개념이다. 상속이나 증여가 일어날 경우 타인에게 매매한 것과 동일하게 보고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캐나다 방식'과 상속인이 물려받은 재산을 매매하는 단계에서 최초 취득가액 대비 차익을 세금으로 물리는 '호주 방식'이 있다.
어차피 세금을 내는 것은 상속세와 마찬가지지만, 최고 50%에 달하는 징벌적 세율 대신 소득세율(6~38%) 범위 내에서 차별 없이 과세한다는 의미다. 재벌가의 편법적인 상속세 회피를 막기 위해 세부담을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다른 세목과의 형평을 맞춰 떳떳하게 납부할 수 있는 명분도 만들어진다.
아직 실현하지 않은 이익에 세금을 매기거나, 소득세와의 이중과세 등 상속세의 본질적 논란을 해결할 수도 있다. 다만 자본이득세를 도입하려면 현행 소득세나 법인세 체계를 모두 손질해야 하기 때문에 방대한 작업이 필요하다.
◇ 우리도 한번 해볼까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지난 달에 이어 27일에도 상속세를 자본이득세로 전환하자는 보고서를 냈다. 송원근 한경연 선임연구위원은 이날 "상속·증여세는 국제적으로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세부담을 완화하고, 장기적으로 자본이득세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 기관의 성격답게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상속·증여세는 과거 전쟁비용 충당 등 일시적인 세수 확보를 위해 시작됐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세수 비중이 극히 낮아졌다는 게 한경연의 분석이다. 스웨덴의 경우 1884년 도입한 상속세를 2005년 폐지했는데, 이후 가족기업에 대한 투자와 가계 저축이 늘어나면서 경제 성장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송 연구위원은 "상속세는 세수확보 기능이 미미한 반면, 세부담으로 인해 조세회피가 발생하면서 기업과 경제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며 "낮은 세수와 높은 과세비용, 행정비용, 투자활동 제약 등을 고려하면 상속·증여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국책연구기관에서도 상속·증여세 완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지난해 발표한 중장기 조세정책방향 보고서에서 "상속세는 세수입이 적은 반면 비효율성이 상당히 크다"며 "투자와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속·증여세를 운영하고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세제 측면의 규제를 완화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반면 우리나라에 자본이득세가 뿌리 내리기엔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다. 자본이득세를 도입하려면 현행 세법을 '개혁' 수준으로 뜯어고쳐야 하는데, 사회적 여건이나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과세당국 관계자는 "상속세 폐지와 자본이득세 도입은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부터 반대 여론이 클 것"이라며 "상속 재산의 사회환원이나 기부 문화 활성화 등으로 재벌가에 대한 인식부터 달라져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상당수 재벌이 과거 개발독재 과정에서 권력과 유착해 부를 축적하고, 편법을 동원해 이를 대물림함으로써 부정적 인식을 키워온 점을 감안할 때 국민정서상 자본이득세 도입에 대한 저항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