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산업의 주축인 개량신약이 최근 위기에 빠졌습니다. 대법원이 지난 1월 17일 '솔리페나신' 특허회피 소송에서 단순 염 변경 개량신약은 오리지널 의약품의 물질특허를 회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개량신약은 ▲약품의 화학구조 일부를 변형하는 염 변경 ▲약의 형태를 캡슐·정제·서방정·과립 등으로 바꾸는 제형 변경 ▲두 가지 이상 성분을 새롭게 합친 복합제 등으로 구분됩니다. 오리지널 의약품을 그대로 복제한 제네릭과는 조금 다른 거죠.
제네릭은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기간이 끝나야 출시할 수 있지만 개량신약은 특허회피가 가능해 좀 더 빠른 출시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개량신약 특히 염 변경 개량신약의 특허회피가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한 겁니다.
◇ 특허권 존속기간 연장시 '염변경 특허회피' 불인정
이번 건은 지난 2016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마에 오른 의약품은 아스텔라스제약의 과민성 방광 치료제 '베시케어'입니다. 베시케어의 물질특허는 2015년 12월 27일 만료 예정이었지만 '특허권 존속기간 연장등록 출원제도'를 통해 2017년 7월 13일까지 특허기간을 연장했습니다.
이 제도는 안정성 시험, 정부의 허가·등록 등 특허 출원으로 지연된 기간만큼 특허 기간을 더 연장해주는 건데요. 연장등록출원이 가능한 대상은 물질·제법·용도·조성물 특허이고, 중간제·촉매·제조장치 특허는 제외됩니다.
당시 아스텔라스제약은 코아팜바이오의 염 변경 개량신약인 '에이케어'가 특허 존속기간이 연장된 베시케어의 특허범위를 침해했다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베시케어의 주성분은 솔리페나신 숙시네이트(숙신산염)이고, 아스텔라스에서 문제를 제기한 코아팜바이오 에이케어의 주성분은 솔리페나신 푸마레이트(푸마르산염)입니다. 아스텔라스는 코아팜의 솔리페나신 푸마레이트도 솔리페나신의 물질특허 범주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1심과 2심에선 국내 제약사들이 쾌재를 불렀습니다. 특허권 존속기간 연장 시 보호받을 수 있는 물질특허가 솔리페나신의 숙신산염에만 미친다고 보고 아스텔라스에 패소 판결을 내렸기 때문인데요. 향후 다른 오리지널 의약품 역시 특허 존속기간이 연장되더라도 국내 제약사들은 염 변경 개량신약을 통해 먼저 시장에 출시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특허법원으로 다시 환송하면서 국내 제약업계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대법원은 특허 존속기간을 연장할 경우 주성분의 특허권을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지침을 반영해 염 변경에 대한 특허회피를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특허법원 역시 대법원의 판단을 적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 글로벌 제약사, 손해배상 대응 등 우려
이에 제약업계는 특허법원에서도 대법원과 같은 판결이 나올 경우 염 변경 개량신약 의존도가 적지 않은 국내 제약산업의 피해가 매우 클 것으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금연치료제 '챔픽스'와 항응고제 '프라닥사'의 염변경 개량신약을 출시했거나 준비 중인 제약사들인데요.
'챔픽스'는 2018년 11월 13일 물질특허가 끝났지만 2020년 7월 19일까지 특허 존속기간을 연장받았습니다. 문제는 한미약품과 종근당, 대웅제약 등 내로라하는 대형 제약사들을 포함한 30여 제약사가 염변경 개량신약을 이미 출시했다는 것이죠.
'베시케어'와 상황이 똑같은 만큼 판결 결과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물질특허 회피를 인정받지 못하면 30개 제약사는 화이자로부터 판매금지와 손해배상 등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요. 그러자 일부 제약사는 지난 1일 진행 예정이던 심결을 미루기 위해 변론 재개를 신청했고, 일부는 판매를 중단하는 등 조치에 나섰습니다.
또한 특허 존속기간 연장을 통해 2021년 7월 17일 만료를 앞둔 '프라닥사'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대원제약과 제일약품, 삼진제약 등 7개 제약사가 프라닥사의 주성분 '다비가트란 에텍실레이트메실레이트'에서 메실산염을 제외한 무염 개량신약을 이달 중 출시할 계획이었지만 이번 판결로 잠정 중단한 상태입니다.
◇ 보험재정 손실 및 신약 연구개발 저해 등 우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염 변경을 통한 개량신약의 조기 출시가 아예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겁니다.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가 개량신약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보험 등재방식을 바꿨는데요. 특허기간 중 염 변경 개량신약을 출시할 경우 오리지널 약가의 80%, 특허만료 후에는 68%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확정될 경우 특허기간 만료 전에 염 변경 개량신약을 출시할 수 없어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됩니다.
특히 과거 화이자의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암로디핀 베실레이트)' 특허가 유효했을 당시 한미약품이 염 변경 제품인 아모디핀을 발매하면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90억원에 달하는 보험재정을 절감하기도 했었는데요. 이는 이번 판결이 보험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대법원의 '베시케어' 판결은 정부가 개량신약을 활성화하려는 취지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험재정에도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며 "국내 제약산업에서 개량신약은 주요 연구개발의 투자 기반이 되는 등 신약 개발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특허법원의 최종 판결에 제약업계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질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