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가 언더웨어 제조업체 '쌍방울'을 인수했습니다. 한때 화장품업계의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리던 그가 이번에는 패션업에 새롭게 뛰어들기로 한 겁니다. 정 대표는 최근 네이처리퍼블릭의 해외 사업 확장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네이처리퍼블릭과 쌍방울이 함께 해외 공략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무리한 인수'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쌍방울이 당장 네이처리퍼블릭에게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물음표가 붙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최근 네이처리퍼블릭의 실적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상황임에도 이번 인수를 위해 무리하게 자금을 조달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조기 상환 이유는
쌍방울은 지난 20일 최대주주가 광림에서 세계프라임개발로 변경된다고 공시했습니다. 세계프라임개발은 이날 광림이 보유한 쌍방울 지분 전량(63만2297주, 12.4%)을 70억원에 넘겨받았습니다. 세계프라임개발은 정운호 대표가 소유한 개인 회사입니다. 정 대표는 세계프라임개발의 지분 40%를 보유하면서 대표이사직도 맡고 있습니다.
나머지 지분 60%도 특수관계자들이 보유 중입니다. 또 정 대표의 부인인 정숙진 씨가 회사 감사를, 정숙진 씨의 동생인 정서진 씨가 회사 사내이사를 맡고 있죠. 이 회사는 부동산 임대료와 관리비 수입을 통해 연간 적게는 1억원대, 많게는 30억원대의 매출을 내고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세계프라임개발이 쌍방울 인수 직전에 자금을 조달한 경로입니다. 세계프라임개발은 2023년 말 기준 보유 현금이 8억7000만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쌍방울 인수에 70억원을 쏟아부었죠. 이 돈의 출처는 네이처리퍼블릭이 최근 상환한 돈으로 추정됩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그간 세계프라임개발로부터 여러 차례 운영자금을 차입해왔습니다. 가장 최근의 차입은 지난해 6월 1년 만기로 빌린 103억원의 단기차입금입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이 차입금 상환을 위해 지난 16일 전환사채(CB)를 발행하고 총 7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는데요.
이 차입금의 만기가 아직 5개월 이상 남았다는 점, CB 발행 시점으로 짐작컨대 세계프라임개발이 쌍방울 인수를 위해 네이처리퍼블릭으로부터 조기 상환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두 회사의 실적 악화
하지만 쌍방울 인수가 정운호 대표와 네이처리퍼블릭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쌍방울은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 탓에 상장 폐지 위기에 놓여있는데요. 2023년부터 주식 거래가 정지된 상황에서 실적마저 악화하고 있습니다. 쌍방울의 지난해 1~3분기 매출액은 651억원으로 전년 대비 9.2% 줄었습니다. 같은 기간 영업손실 13억원을 내며 적자 전환했죠. 또 세계프라임개발이 확보한 쌍방울 지분도 12.4%에 불과해 추후 경영권이 흔들릴 위험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네이처리퍼블릭이 조기 상환을 위해 발행한 이번 CB가 향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네이처리퍼블릭의 이번 CB는 3년 만기에 표면이자율이 5%, 만기이자율은 15%입니다. 네이처리퍼블릭이 3년간 채권자에게 내야 하는 이자는 10억5000만원에 달합니다. 일반적으로 CB는 시중은행 차입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 조달이 가능해 기업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지만 네이처리퍼블릭의 이자율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어떤 기업에게는 10억원이 큰 돈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2016년부터 단 한 차례도 연간 순이익을 내지 못한 네이처리퍼블릭에게 10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실적이 다시 악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네이처리퍼블릭의 지난해 1~3분기 누적 매출액은 874억원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18.4% 감소했습니다. 내수와 수출 매출이 각각 전년보다 22.4%, 11.2%씩 줄어든 탓인데요. 이 때문에 1~3분기 누적 영업손실도 43억원으로 전년 동기(1억8000만원)보다 크게 늘었습니다.
기업가치 '뚝'
네이처리퍼블릭의 실적이 악화하면서 기업가치도 하락하고 있습니다. 네이처리퍼블릭이 지난해 4월 발행을 추진했던 CB와 이번에 새롭게 발행하는 CB를 비교하면 알 수 있는데요. 지난해 4월의 CB는 150억원 규모로 만기 3년, 표면이자율 4.0%, 만기이자율 8.0%였습니다. 이번 CB는 조달 자금 규모가 기존의 절반에 불과하고 이자율도 크게 뛰었습니다.
특히 두 CB의 전환가액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CB는 채권자가 만기에 돈을 되돌려받는 대신 회사의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채권입니다. 지난해 발행하려던 CB의 경우 주당 전환가액이 1만2000원으로 설정됐는데요. 반면 올해 발행한 CB의 전환가액은 주당 6700원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네이처리퍼블릭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죠.

지난해 CB는 신생 사모펀드 서울프라이빗에쿼티(서울PE)가 투자하기로 했지만 예정됐던 4월 납입이 불발됐습니다. 지난해 3분기까지도 납입이 이뤄지지 않아 서울PE의 투자가 최종 불발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번에 네이처리퍼블릭이 더 불리한 조건의 CB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한편 네이처리퍼블릭의 이번 CB는 비비원조합에게 발행됩니다. 비비원조합은 KH그룹이 지난해 3분기 설립한 투자조합인데요. 최근 대양금속 인수 후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죠. 다행히 네이처리퍼블릭의 이번 CB는 지난 16일 이미 납입이 완료됐습니다.
CB가 발행됐으니 추후 네이처리퍼블릭의 주주명부에도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비원조합이 주식 전환을 선택한다면 네이처리퍼블릭의 지분 11.2%를 확보하고 단숨에 2대 주주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업계에서는 네이처리퍼블릭이 그간 개척한 해외 수출망을 중심으로 쌍방울과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주목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쌍방울이 상장폐지를 면하는 것이 선결과제 입니다. 이번에 쌍방울의 주인이 바뀐 만큼 한국거래소는 조만간 쌍방울의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할 전망입니다. 네이처리퍼블릭과 정 대표에게 쌍방울 인수가 '신의 한 수'가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