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우리는 '화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들에는 이름을 외우기도 어려운 다양한 물질이 섞여 있죠. 가장 대표적인 게 '라면'일 겁니다. 스프야 다양한 감미료가 들어간다 치더라도 면에는 밀가루와 튀김용 기름만 들어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라면의 성분표를 보니 '난각칼슘, 탄산칼륨, 탄산나트륨, 제이인산나트륨, 구아검, 토코페롤, 알긴산프로플렌글리콜, 펙틴, 구연산' 등이 더 있어야 합니다. 이름만 들어선 라면 면발에 이게 왜 필요한가 싶을 정도죠.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성분을 나도 모르게 먹고 있다는 생각이 강해지다 보면 '자연주의'로 회귀하게 됩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단순명쾌한 논리입니다. 첨가물이 들어간 주스를 마시는 대신 과일을 먹고, 대기업 공장에서 만드는 간편식 대신 직접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자는 거죠.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기술 불신론'에 빠지게 됩니다. 대규모 생산과 기술 개발에 따른 처리 과정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최근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생우유(raw milk)' 이슈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생우유 옹호파로 알려지면서 생우유를 마시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팩 우유나 플라스틱 병에 든 우유는 살균 처리를 거친 '살균 우유'입니다. 우유의 살균 처리는 130도 이상에서 2초 이상 살균하는 고온 살균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우유가 고온살균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일부 63도에서 30분 이상 살균하는 저온 살균 방식을 사용하는 우유도 있습니다. 저온 살균 방식이 우유의 맛과 영양소를 더 잘 보존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일부에선 저온살균우유를 '생우유'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요. 잘못된 용어입니다.
살균하지 않은 생우유가 좋다는 사람들의 주장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저온 살균이 맛과 영양소를 더 잘 지킨다면 아예 살균하지 않은 생우유는 더 좋을 거라는 겁니다. 살균 과정을 거치며 생우유 속의 유익균이 파괴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오렌지 과즙에 온갖 향료를 넣은 저가 오렌지 주스보다 100% 오렌지 주스가 맛과 영양소 모두 낫고, 물을 타지 않은 100% 착즙 주스는 그보다 더 낫다는 건 상식이죠. 우유에도 이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유업계에 물어봤습니다.
끓여 드세요 꼭
다양한 유기업에 생우유와 살균우유의 장단점에 대해 물어본 결과, 모두 입을 모아 "생우유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우선 생우유는 살균을 하지 않는 만큼 젖을 짜는 과정에서 소의 분비물이나 균이 그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균이 살아있는 만큼 보관 기간도 극히 짧아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감염'입니다. 생우유는 리스테리아, 살모넬라, 대장균 등 식중독균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와 FDA(식품의약국)도 생우유 섭취에 따른 식중독 사례를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FDA에 따르면 1987년 이후 오염된 생우유를 섭취한 뒤 유산·사산·신부전·사망 등의 심각한 질병 사례가 총 143건 발생했다고 합니다. 배탈이나 장염 등 소소한 사례는 이보다 훨씬 더 많겠죠. 이 때문에 어린이나 노인, 임산부 등 면역체계가 취약한 대상의 생우유 섭취를 권고하지 않습니다.
아예 생우유 판매가 금지된 곳도 많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축산물위생관리법 등에 따라 일반 소비자에게 살균하지 않은 생우유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20개주에서는 생우유 판매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균 처리를 하면 생우유에 있는 유익균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유해균을 없애는 게 훨씬 더 이득이 되기 때문에 살균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사실 생우유가 건강에 이점이 있다는 주장 역시 '주장'에 그칩니다. 실제로 생우유가 건강 상에 특별한 이점이 있다는 증거는 확인된 바가 없다는 게 유업계의 공통된 반응입니다.
더 맛있다면 조금 덜 깨끗해도 된다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업계에서는 이 역시 '생우유에 대한 환상'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고온 살균 처리를 거친 우유는 유당과 단백질이 열을 받으며 고소한 맛이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살균우유보다 멸균 우유가 더 고소한 맛이 난다고 하네요.
즉, 살균 우유는 생우유보다 건강에도 좋고, 맛도 더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더해 보관도 더 오래 할 수 있고 구하기도 쉽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요. 생우유가 건강에 더 좋을 거라는 건 손을 대지 않은 자연적인 게 몸에 좋다는 환상 때문입니다. 이 주장이 들어맞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우유에 있어서만큼은 아닙니다. 국내에서라도 이런 '생우유 옹호론'이 불거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