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은 '잭팟'에 비유된다. 성공의 문턱은 매우 높지만, 블록버스터급 신약 하나만 개발해도 큰 결실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기업의 연구개발비 규모를 보면 신약 개발 성공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회계장부의 개발비 자산화율에 따라 진행 중인 연구 프로젝트의 성공 시점을 헤아려 볼 수도 있다. 연구개발비를 통해 국내 제약바이오 및 진단키트 기업의 연구 개발 성과와 현황을 짚어봤다. [편집자]
코로나 이후 R&D 투자 '대폭' 확대
진단키트 분야는 코로나19 수혜를 입은 대표 업종이다. 팬데믹 이전까지 체외진단 업계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돈 안 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 직후 발 빠르게 진단키트 개발에 성공하면서 이들의 위상도 빠르게 높아졌다. 진단키트 기업들은 팬데믹 동안 확보한 풍부한 자금을 연구개발(R&D)과 시설 증축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나섰다.
국내 주요 진단키트 기업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17일 진단키트 업계에 따르면 에스디바이오센서의 연결기준 매출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730억원에서 지난해 2조9300억원으로 대폭 뛰었다. 2년 새 매출이 40배가량 증가하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을 단숨에 앞질렀다. 씨젠도 연결기준 매출이 2019년 1220억원에서 1조3708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 엑세스바이오의 연결기준 매출은 5051억원으로, 지난 2019년(430억원)보다 11배 이상 성장했다.
외형 성장과 함께 연구개발비도 늘고 있다. 에스디바이오센서·씨젠·엑세스바이오·휴마시스·바이오니아 등 주요 진단키트 기업 5곳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씨젠이 지난해 755억원으로 가장 많은 금액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씨젠은 지난 2019년 98억원에서 2020년 259억원으로 연구개발비 투자를 지속해서 늘리는 모습이다.
에스디바이오센서도 팬데믹 기간 연구개발비 투자를 크게 늘렸다. 2019년 48억원 수준이었던 연구개발비는 지난해 189억원까지 증가했다. 바이오니아도 2019년 16억원이었던 연구개발비를 지난해 200억원으로 12배 넘게 확대했다. 지난해 엑세스바이오와 휴마시스의 연구개발비는 각각 59억원, 24억원이었다. 두 기업 모두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보다 2배 이상 늘렸다.
자산화 0%…현금성 자산은 '두둑'
진단키트의 연구개발비 회계 처리 기준은 간단명료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진단시약 기업의 경우 제품의 허가 신청, 외부 임상 신청 등 제품 검증 단계부터 개발비를 자산화할 수 있다. 외부의 객관적인 제품 검증이 있어야만 자산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내 진단키트 기업 대부분은 개발비를 무형자산으로 인식하지 않고, 비용으로 분류한다. 에스디바이오센서, 엑세스바이오, 휴마시스, 바이오니아는 모두 지난 3년간 개발비 자산화율을 0%로 유지했다. 씨젠만 지난 2020년 2억원가량의 개발비를 자산화했다. 성매개감염증 진단기기와 호흡기질병 진단기기의 개발비 일부를 무형자산으로 인식했다.
다만 씨젠은 지난해 2월 개발비 과대계상 문제로 증권선물위원회의 징계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씨젠은 지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쓴 772억원의 개발비를 무형자산으로 인식했는데 금융 당국은 씨젠이 기술적 실현가능성을 충족하지 못한 제품의 개발비를 자산화했다고 판단, 과징금 부과 등의 처분을 내렸다.
주목할 점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이들 기업의 현금 보유고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제품 개발에 오랜 기간과 대규모 비용이 드는 신약이나 바이오시밀러 사업과 달리, 진단키트는 상대적으로 개발이 쉽고 매년 매출이 발생해 현금흐름이 좋은 사업으로 꼽힌다. 신약의 개발 기간은 약 10년, 바이오시밀러는 4년이 걸리는 반면, 진단키트는 통상 8개월 정도면 개발이 완료된다.
실제 에스디바이오센서의 현금성 자산(단기금융상품 포함)은 2019년 말 기준 192억원에서 지난해 말 1조2052억원까지 증가했다. 씨젠의 현금성 자산 역시 연말 기준 2019년 540억원, 2020년 3100억원, 지난해 4322억원으로 불어났다. 엑세스바이오의 지난해 말 현금성 자산도 2010억원에 달했다. 2019년 말 89억원 정도였던 현금성 자산이 23배 가까이 늘었다.
현금 보따리 푼다…'신사업' 찾기 주력
진단키트 기업들은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한 신성장 동력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팬데믹이 끝나면 진단키트 시장이 다시 위축될 것이란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이들 기업은 풍부해진 자금력을 바탕으로 연구개발 투자는 물론 인수·합병(M&A), 생산설비 증축 등에 활발하게 나섰다.
에스디바이오센서는 M&A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회사는 지난달 사모펀드(PEF) 운용사 SJL파트너스와 함께 미국 나스닥 상장 체외진단 기업 '메리디언 바이오사이언스'를 약 2조원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해 현재 유럽·아시아 위주로 발생하는 매출 구조를 다각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밖에도 독일 체외진단 유통사 '베스트비온', 브라질 진단기업 '에코 디아그노스티카' 등을 인수하며 외형 확장에 주력하는 중이다.
씨젠은 '분자진단 대중화'를 앞세워 신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회사는 코로나19 등 감염병 외에 인구 고령화 및 현장진단(POC), 홈케어 수요 등 다양한 영역의 진단 시장이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 사업 본격화를 위해 올 초 외부 전문가를 연이어 영입한 데 이어 미국 서부 해안 지역에 분자진단 제품 생산시설을 설립할 계획도 내놨다. M&A 및 지분투자 등에도 나설 예정이다.
진단키트 업계는 대부분 기업이 개발비를 자산화하지 않는 만큼 개발비 회계 처리 관련 리스크는 거의 없는 편이다. 업계 관계자는 "진단키트 기업은 일부 제품 인증 이후 연구개발을 진행하면서 추가적인 지출이 발생하거나 후속 임상이 필요할 때 자산화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앞으로 국내 진단키트 기업의 과제는 코로나 동안 확보한 현금을 통해 장기적인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