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시대가 현실로 다가왔다. 작년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얻은 후 AI는 우리의 삶과 더욱 가까워졌다. AI가 일반 대중의 삶으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산업계에도 'AI 빅뱅'이 몰아쳤다. AI 성장에 필수적인 반도체는 불황을 이길 원동력을 얻었고, 침체가 지속됐던 가전과 스마트폰 시장에도 활기가 돌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AI 시대에 발맞추기 위한 국내 기업의 행보를 살펴본다.[편집자]
올해 반도체 시장은 역대급 '바닥시기'를 경험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IT(정보기술) 분야 수요 부진이 지속되면서 반도체 수요감소-재고증가-가격하락으로 이어져 수익성이 급락했다.
이 와중에 AI는 얼어붙은 반도체 시장에 한 줄기 희망이 됐다. AI를 구동하기 위해선 기존 D램에 비해 빠른 연산 속도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이 AI 시장의 핵심 제품으로 꼽히는 이유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고성능 제품이다. 챗GPT와 같은 AI 분야 데이터 처리에 쓰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필수적이다.
AI 반도체의 성장은 AI 기술 성장과 비례한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AI 반도체 시장은 지난해 442억달러 대비 20.9% 증가한 534억달러를 기록할 전망이다. 오는 2027년에는 2배 이상 성장해 1194억달러까지 규모를 키울 것으로 예상된다.
앨런 프리스틀리 가트너 애널리스트는 "생성형 AI의 발전과 데이터센터, 디바이스 등 광범위한 AI 기반 애플리케이션 사용 증가에 따라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최적화된 반도체 디바이스 구축이 필수가 됐다"며 "이것이 AI칩의 생산과 배포를 주도하는 주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한파 녹인 AI 훈풍
AI를 주축으로 반도체 시장이 회복세를 보이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올 상반기 반도체 사업에서 수조원대 적자를 기록했던 양사는 3분기부터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3분기부터 메모리 사업 실적이 개선되며 전 분기 대비 적자폭이 줄었다. 올 3분기 연결 기준 DS(디바이스 솔루션, 반도체) 부문 영업손실은 3조7500억원으로 전 분기 대비 6100억원 감소했다. 올해 3개 분기 누적 적자는 12조6900억원에 달하지만, 지난 1분기 이후 지속 감소세다.
AI에 '진심'이었던 SK하이닉스는 빠르게 수익성을 높이는 추세다. 지난해 4분기부터 적자를 기록 중인 SK하이닉스는 올 3분기엔 전기비 적자 폭을 1조원 넘게 줄였다.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 3조4023억원의 영업손실로 바닥을 찍은 후 2분기 2조8821억원, 3분기 1조7920억원으로 적자 규모를 줄이고 있다.
특히 올 3분기 D램 사업이 흑자 전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흑자전환의 일등 공신은 'AI'였다. 고성능 모바일 D램 DDR(더블데이터레이트)5와 AI용 메모리 HBM 등 고성능 메모리 제품을 중심으로 시장 수요가 증가해 적자 폭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게 SK하이닉스 측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AI가 빠르게 진화하면서 HBM 수요도 최신 버전으로 빠르게 옮겨갈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HBM2e 수요 비율은 작년 70%에서 올해 50%까지 줄어들고, 같은 기간 차세대 제품인 HBM3는 8%에서 39%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2024년에는 HBM3를 채택한 칩의 수가 증가하며 HBM3 수요가 HBM2e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장의 빠른 성장세에 힘입어 HBM 시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업계 리더십 확보를 위해 HBM3로의 전환을 서두르는 모양새다. 내년 상반기 HBM 전체 판매 물량에서 HBM3의 목표 비중은 과반 수준이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장(부사장)은 올 3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전화회의)에서 "내년 HBM 공급 역량은 업계 최고 수준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올해 대비 2.5배 이상 확보할 계획으로, 이미 해당 물량에 대해 고객사들과 내년 공급 협의를 완료했다"면서 "HBM3는 3분기 8단, 12단 제품 모두 양산 제품 공급을 시작했고, 4분기 고객사 확대를 통해 판매를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로드맵도 빠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8월 1bnm(5세대) 기반의 HBM3E 제품 샘플을 고객사에 공급했고, 내년 2분기 HBM3E 양산을 개시할 계획이다. 이미 내년 생산될 물량까지 완판된 상태다.
박명수 SK하이닉스 D램 마케팅 담당은 "HBM3와 HBM3E을 포함해 내년 생산능력이 현시점에서 솔드아웃(판매완료)됐고, 고객들의 추가 수요 논의도 들어오고 있다"며 "고객이나 시장 관계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의 HBM3E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기술 격차 벌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시장에서의 우위를 지켜내기 위해 기술 개발과 투자를 이어갈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에 AI를 탑재하는 트렌드에 발맞춰 '온디바이스 AI'를 위한 메모리 기술에 집중할 방침이다. 온디바이스 AI는 스마트 기기에서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연사하는 방식이다. 단말기 내부에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빠르고 안전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해리 윤 삼성전자 메모리마케팅팀장(부사장)은 지난 13일 홍콩에서 개최한 '인베스터스 포럼 2023'에서 "핀당 9.6Gbps(초당 기가비트), 초당 76.8GB(기가바이트)의 대역폭을 지원하는 LPDDR5X 신제품을 개발 중이며 내년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 세대 제품(8.5Gbps) 대비 빠른 속도다. '하이 K 메탈 게이트' 기술을 적용해 전력 효율도 30% 높였다.
또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한 AI 모델을 실행하는데 적절한 LPCAMM의 첫 번째 제품도 샘플링에 돌입했다. 또 LLW( Low Latency Wide I/O, 저지연성 와이드 I/O) D램도 내년 선보일 계획이다. 이는 LPDDR5보다 70% 낮은 초저전력으로 초당 128GB의 초고성능을 제공하도록 설계됐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AI Everywhere for a better future'를 주제로 열린 'SK 테크 서밋'에서 차세대 메모리 솔루션을 선보이며 '글로벌 No.1 AI 메모리 솔루션 공급자'로서 혁신적인 기술 연구와 개발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SK하이닉스는 차세대 메모리 모듈 LPCAMM2를 공개하기도 했다. LPCAMM2은 LPDDR5X 기반의 모듈 솔루션 제품으로, 공간 절약뿐만 아니라 저전력과 고성능 특성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향후 노트북 시장을 시작으로 저전력, 고성능 특성이 요구되는 서버, 데이터 센터, 엣지 컴퓨팅 등 적용 분야가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또 SK하이닉스는 맞춤형 제품을 원하는 AI 시대의 특성에 맞춰 '시그니처 메모리'에 집중할 전망이다. AI를 통해 구상하는 서비스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메모리에 요구하는 스펙이 다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이달 초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특별강연을 통해 "고객별로 다양해지는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SK하이닉스만의 '시그니처 메모리'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SK하이닉스는 AI에 집중해 시그니처 메모리를 개발하고 있다"며 "이미 HBM 같은 제품을 통해 SK하이닉스는 AI용 메모리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