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도 금융상품에 대한 녹취·숙려제도가 시행된 지 2주일 차에 접어들었지만 불만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사실상 동일한 효과를 가진 상품이라도 상품 형태에 따라 규제가 달라 '동일 기능 동일 규제 원칙'이 깨졌다는 지적과 함께 충분한 업계 의견 수렴 과정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로 제도가 도입됐다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 규제 도입이 갑작스럽게 이뤄지면서 적잖은 판매사들이 일부 고난도 금융상품에 대해 판매를 중단하는 등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 고난도상품 규제 강화에 은행들 펀드 무더기 중단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규제 강화 부작용은 판매단에서부터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18일 은행권에 따르면 최근 국내 8개 주요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기업·SC제일·한국씨티은행)은 전날 기준 총 171개(중복 포함) 상품의 판매를 일시 중단했다. 판매가 중단된 상품은 대부분 상장지수펀드(ETF)를 재간접으로 투자한 국내 주식 파생형 펀드와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역외펀드다.
주요 은행의 금융투자상품 무더기 판매 중단은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녹취·숙려 제도 등 대폭 강화된 금융상품 판매 규제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0일 금융사들이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또는 '고난도 투자일임·금전신탁계약'을 판매할 때 판매·계약체결 전 과정을 녹취하고 2영업일 이상의 숙려기간을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또는 고난도 투자일임·금전신탁계약에는 △원금 20%를 초과하는 손실이 날 수 있는 파생결합증권(DLS) △파생상품 △투자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펀드‧투자일임‧금전신탁계약 등이 속한다.
이는 지난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당시 투자자 대부분이 원금손실 가능성을 모르고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으면서 불만이 폭주하자 재발 방지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 곱버스는 일반상품인데 곱버스 펀드는 '고난도상품'?
자산운용업계는 이번 고난도 금융상품 규제가 ETF에는 적용되지 않고, ETF를 편입한 펀드에만 적용되는 등 '동일기능-동일규제' 원칙을 깼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위는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에서 ETF는 제외한 반면 ETF 펀드는 고난도 상품에 포함했다. 개인이 직접매매를 할 수 있는 ETF와 달리 판매 직원 권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운용업계가 '동일기능, 동일 규제 원칙'을 깨뜨렸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예로는 '곱버스'와 '곱버스 펀드'를 들 수 있다. 곱버스로 불리는 '인버스 2X'는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ETF로 지수가 내리면 지수 하락률의 2배 가량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상품으로 대표적인 고위험성 파생상품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KODEX 200선물인버스 2X'가 있으며 국내 5개 운용사(삼성자산운용·미래에셋자산운용·KB자산운용·한화자산운용·키움투자자산운용)가 곱버스를 운용 중이다.
이번에 판매가 중단된 펀드 중에서도 곱버스와 유사한 효과를 내는 펀드가 있다. NH-아문디자산운용의 '코리아 2배 인버스 레버리지 펀드'다. 이 펀드는 지난달 16일 기준 TIGER 200선물인버스2X 25.98%, KODEX 200선물인버스2X 24.48%, KODEX 인버스 21.58%, HANARO 단기통안채 19.52%, KBSTAR 200선물인버스2X 4.77% 등 곱버스를 대거 편입하고 있다.
이외에 레버리지·인버스 ETF 등을 편입한 펀드인 미래에셋 차이나H레버리지1.5펀드, 삼성 KOSPI200인버스인덱스펀드, 삼성 KRX300 1.5배레버리지펀드, 한국투자 코스닥두배로펀드, KB스타 코리아리버스펀드, KB스타 코리아레버리지2.0펀드, 신한 유로커브드콜인덱스펀드, NH-Amundi 코리아2배레버리지펀드, NH-Amundi 1.5배레버리지인덱스펀드 등도 모두 판매 중단된 상태다.
은행은 ETF를 직접 취급할 수 없어 이처럼 ETF를 편입한 펀드를 판매해 왔으나 이번 규제로 이들 펀드의 판매가 어려워진 것이다.
한 운용사 임원은 "곱버스나 곱버스 펀드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수단이 다른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동일 전략·수익률을 추구하는 펀드임에도 규제를 달리하고 있다"며 "규제 기본 원칙인 '동일 기능, 동일 규제' 원칙이 무너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DLF 사태의 후속 조치다 보니 투자 권유가 없는 ETF와 같은 경우 고난도 논의에서 제외됐다"며 "주식형 펀드와 주식이 다르듯 ETF 운용펀드는 ETF와 다른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