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개인투자자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금융투자상품을 고르라면 상장지수펀드(ETF)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지난해 거세게 불어닥친 직접투자 열풍이 한풀 꺾인 가운데 ETF는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갖춘 분산투자의 대표 상품으로 전성기를 열었죠.
그래서일까요. 최고의 먹거리로 떠오른 ETF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자산운용사들의 각축전 역시 그야말로 불을 뿜는 형국입니다. 운용사들의 전통적 수익원이었던 공모펀드 시장 부진이 장기화, 아니 사실상 고착화한 상황에서 ETF 패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운용업계의 판도 또한 확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ETF의 중요성과 그 입지는 연말을 맞아 본격화하는 운용사 조직개편과 인사에서 또 한 번 확인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국내 ETF 시장의 서막을 연 장본인이자 업계 1위인 삼성자산운용을 보면 말이죠.
삼성그룹은 최근 단행한 삼성운용 인사에서 심종극 대표를 용퇴시키고 삼성증권 세일즈앤트레이딩(S&T)부문장을 맡고 있던 서봉균 전무를 부사장 대표이사로 승진시켰습니다.
1962년생의 심 대표 대신 1967년생인 서 전무에게 삼성운용 사령탑을 맡긴 것은 표면적으로는 삼성그룹 차원의 '혁신적' 세대교체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심 대표의 임기가 아직 1년 남짓 남았다는 점과 고작 한 살 차이 나는 장석훈 삼성증권 대표(1963년생)가 유임에 성공한 것을 비춰 보면 단순한 세대교체로 보기에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운용업계는 삼성운용의 대표 교체 배경을 두고 올들어 눈에 띄게 떨어진 삼성운용의 ETF 경쟁력에 대해 그룹 차원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TF 하면 삼성운용'이라 할 정도로 ETF는 삼성운용의 간판 상품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 삼성운용의 ETF 시장 지배력은 최근 확연히 약화하는 추세입니다.
16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0일 기준 삼성운용의 ETF 시장 점유율은 43.1%로 지난해 말 52.0%보다 9%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7년 7월 48.7%를 기록한 이후 4년여 만에 점유율 50%가 깨진 것도 모자라 40%대 점유율마저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순자산이 27조506억원에서 30조3809억원으로 3조3300억원가량 늘었음에도 점유율이 이렇게 큰 폭으로 떨어진 것은 경쟁자들의 거센 추격 때문입니다.
'KODEX(삼성운용 ETF 브랜드) ETF 타도'를 외치며 맹렬한 추격전에 나선 2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순자산은 같은 기간 13조1686억원에서 24조4109억원으로 무려 11조2400억원 넘게 증가하면서 점유율 역시 25.3%에서 34.6%로 9.3%나 늘었습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26% 넘게 벌어졌던 삼성과 미래에셋운용의 점유율 격차가 고작 8%대로 좁혀진 것이죠.
두 회사와 차이가 크긴 하지만 KB자산운용(6.5%→8.1%)과 한국투자신탁운용(4.7%→5.1%)의 약진도 꽤나 매섭습니다. 삼성운용 입장에선 사태의 심각성에 불안감을 느낄 법합니다.
삼성운용의 위기의식은 'ETF의 아버지'로 불리는 배재규 부사장의 '깜짝 이직'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직 한국투자금융지주의 공식 발표는 없지만 배 부사장이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로 내정됐다는 얘기는 업계에서 더는 비밀이 아닙니다.
배 부사장은 삼성운용이 2002년 국내 ETF의 효시 격인 'KODEX 200'를 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삼성운용을 지금의 ETF 최강자로 이끈 주인공입니다. 삼성운용 ETF를 대표하던 그가 한투운용 대표로 이동하는 것은 단순한 이직을 넘어서 삼성운용 ETF 조직의 대변화를 의미합니다.
배 부사장의 이동과 맞물려 삼성운용이 삼성생명 자산운용본부장 출신을 대표로 기용하던 관행을 깨고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금융사에서 잔뼈가 굵은 서봉균 전무를 수장에 앉힌 것도 이같은 변화 가능성에 무게를 더합니다.
실제 삼성운용은 새 대표 선임 소식을 전하면서 "ETF 시장 지위를 공고히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어수선한 조직 분위기를 다잡고 ETF 점유율을 다시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를 받은 서 신임 대표의 어깨가 상당히 무겁게 됐습니다.
삼성운용이 ETF 점유율 하락의 후폭풍에 시달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테마형과 해외 투자 상품을 발판으로 ETF 돌풍을 일으킨 미래에셋운용은 연말 파티 분위기입니다.
삼성운용에서 배재규 사단의 일원으로 ETF 개발과 운용을 담당하다 2019년 미래에셋운용으로 넘어온 김남기 ETF운용부문 대표는 지난달 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했습니다. 특히 상무보에서 상무를 건너뛰고 단번에 전무를 달아 화제가 됐죠. 박현주 회장을 위시한 미래에셋 최고경영진이 김 전무가 이끄는 ETF 부문의 성과를 확실히 인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TF를 둘러싼 운용사들의 주도권 전쟁은 갈수록 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강자 지위를 위협받고 있는 삼성운용과 선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미래에셋운용의 1, 2위 대결과 더불어 3, 4위를 달리는 KB운용과 한투운용의 추격전도 더 거세질 가능성이 큽니다. 두 운용사는 '최저 보수 대전'의 불을 댕긴 곳이기도 합니다.
KB금융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과 올해 단독대표를 맡은 이현승 대표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ETF 시장 점유율을 8%대로 끌어올린 KB운용은 더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ETF의 아버지를 수장으로 맞으면서 단숨에 ETF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운용사가 된 한투운용 역시 신임 대표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앞세워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일 전망입니다.
ETF가 금융투자 재테크의 핵심 상품으로 자리 잡으며 운용업계의 주요 수익원이 된 만큼 운용사들은 ETF 시장의 패권을 쥐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이 불꽃 튀기는 경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