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제약바이오 기업과 도매상(의약품유통회사)들이 백신 구매 입찰을 담합한 정황이 발견돼 정부로부터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특히 이번 백신 담합행위에는 글로벌 제약사를 포함해 상위 대형 제약사들도 포함돼 있어 파문이 일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일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유한양행 등 제약바이오 기업과 도매상 등 32곳을 대상으로 백신 구매 입찰과 관련해 부당한 공동행위를 한 혐의로 과징금 409억원을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백신 제조사로는 글로벌 제약사인 GSK 1곳과 광동제약, GC녹십자, 보령바이오파마, 에스케이디스커버리, 유한양행, 한국백신판매 등 백신총판 6곳, 의약품도매상 25곳 등 총 32개 백신 관련 사업자들이 지난 2013년 2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조달청이 발주한 170개 백신 입찰에서 사전에 낙찰예정자를 정하고 들러리를 섭외한 후 투찰할 가격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담합한 것으로 확인됐다.
업체별 과징금액은 에이치원메디가 115억5200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백신판매 71억9500만원 △정동코퍼레이션 43억400만원 △HLB테라퓨틱스 40억6500만원 △새수원약품 34억5500만원 △녹십자 20억3500만원 △송정약품 16억9700만원 △팜월드 10억4100만원 △웰팜 9억1800만원 등의 순이었다. 이밖에 SK디스커버리(4억8200만원), GSK(3억5100만원), 광동제약(3억4200만원), 유한양행(3억2300만원)도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백신제조사'는 백신을 실제 생산하는 회사를, '백신총판'은 백신제조사와 공동 판매계약을 체결한 회사를, '의약품도매상'은 이들로부터 백신을 공급받아 병·의원, 보건소 등에 유통하는 회사를 의미한다.
이들이 담합한 대상 백신은 모두 정부 예산으로 실시되는 국가예방접종사업(NIP) 대상 백신으로 인플루엔자 백신, 간염 백신, 결핵 백신, 파상풍 백신, 자궁경부암 백신(서바릭스, 가다실), 폐렴구균 백신(신플로릭스, 프리베나) 등 모두 24개 품목에 이른다.
공정위에 따르면 낙찰예정자는 최대한 높은 금액으로 낙찰받기 위해 기초금액(조달청이 시장가격, 전년도 계약가 등을 참고해 검토한 가격으로 입찰참여자들은 상한가격으로 인식)의 100%에 가깝게 투찰하고, 들러리는 이보다 몇 % 높게 투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백신입찰 시장에서 장기간에 걸쳐 고착화된 들러리 관행과 만연화된 담합 행태로 인해 입찰담합에 반드시 필요한 들러리 섭외나 투찰가격 공유가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낙찰예정자는 전화 한 통으로도 쉽게 들러리를 섭외할 수 있었고, 낙찰예정자와 들러리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에 따른 학습효과로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면 굳이 투찰가격을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투찰함으로써 이들이 의도한 입찰담합이 정황상 이뤄진 것으로 공정위는 판단했다.
정부가 글로벌 제약사가 생산하는 백신(자궁경부암 백신, 폐렴구균 백신 등)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제3자단가계약방식*'에서 '정부총량구매방식**'으로 2016년(일부 백신은 2019년)부터 조달방식을 변경했다. 이후 글로벌 제약사와 백신총판이 백신입찰담합에 참여하면서 글로벌 제약사가 직접 들러리를 섭외하고 백신총판이 낙찰예정자로 등장했다.
*제3자단가계약방식: 전체 사용물량 중 5~10% 가량을 사용하는 보건소에 소요되는 접종물량에 대해 입찰을 실시하고, 나머지 90~95% 가량의 병의원 사용물량은 보건소 입찰결과에 따라 공급가격을 결정하는 방식
**정부총량구매방식: 보건소외에 병의원의 소요물량까지 포함한 전체 물량에 대해 입찰로 구매하여 공급하는 방식으로, HPV(자궁경부암 백신 : 서바릭스, 가다실)은 2016년부터, PCV(폐렴구균 백신 : 신플로릭스, 프리베나)은 2019년부터 도입
구체적으로 백신조달에 있어 기존 '제3자단가계약방식'에서는 의약품도매상끼리 낙찰예정자와 들러리 역할을 바꿔가면서 담합했으나 '정부총량구매방식'에서는 낙찰예정자가 의약품도매상이 아니라 백신총판이 된 것이다. 다만 의약품도매상은 구매방식 변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들러리 역할을 수행했고, 백신총판은 들러리 역할은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녹십자, 보령바이오파마, 그리고 SK디스커버리(구 SK케미칼) 등 3개사의 경우 인플루엔자 백신 담합으로 2011년 6월 제재를 받은 이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이 사건 입찰담합에 참여함으로써 시정명령과 과징금 처분을 받게 됐다.
공정위는 "이번 조치는 백신제조사, 백신총판 그리고 의약품도매상 등 국내 백신 시장에서 수입, 판매 및 공급을 맡은 사업자들이 대부분 가담한, 장기간에 걸친 입찰담합의 실태를 확인하고 백신입찰 시장에서의 부당한 공동행위를 제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공정위는 앞으로도 국민 건강에 필수적인 백신 등 의약품 관련 입찰담합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법 위반행위가 적발되는 경우 엄정한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