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에 우호적인 입장을 밝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면서 제약업계에도 '비트코인'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현금을 대신할 안전자산으로 비트코인에 투자한 바이오텍(신약개발사)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첫 스타트를 끊은 곳은 항생제 신약을 개발하는 미국계 바이오기업인 아크르스 파마슈티컬스입니다.
아크르스는 지난 20일 비트코인 100만달러(13억원) 어치를 구매하는 안건을 이사회에서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데이비드 루시 대표는 "공급량이 제한적이고 물가상승에 적은 영향을 받는 특징으로 저장가치가 있다"고 투자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같은 날 나스닥에 상장한 미국계 바이오기업인 호스 테라퓨틱스, 이스라엘 소재 엔라이벡스 테라퓨틱스도 이같은 이유로 비트코인을 각각 100만달러치를 구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언뜻 본업으로부터 한눈을 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신약개발을 위해 재무적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바이오텍의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신약개발 초기 단계의 바이오텍에 재무관리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신약개발 과정에는 평균적으로 10년이 넘는 시간과 한화로 2조원에 달하는 자금이 소요되는데요. 바이오기업은 이 자금을 대체로 외부 투자자로부터 조달합니다.
대부분의 바이오텍은 약물의 개발 타임라인에 맞춰 투자계획을 세우지만 종종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투자자들에게 보여줄 약물의 임상적 근거를 확보하는 일이 지연되거나 실패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실제 이번에 비트코인에 투자한 엔라이벡스는 지난해 항암제 개발을 중단하면서 직원 절반을 해고했고 이를 통해 내년까지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을 마련한 상태입니다. 글로벌 투자정보업체인 심플리월스트리트는 아크르스도 보유 현금이 1년 내로 바닥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기 단계의 바이오기업이 무언가에 투자를 한다는 건 생존을 위한 고민 끝에 나온 처절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형 제약사는 어떨까요. 일정 규모 이상의 매출을 갖춘 제약사에 투자란 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신기술을 확보하거나 공동개발 등의 협업을 통해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이자, 애브비 등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러한 이유로 자체 벤처캐피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투자수익이지만 단순 재무적 관계를 넘어 전략적 협력관계로 이어지는 투자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사노피는 지난 2018년과 2020년 두 차례 자체 벤처캐피탈을 통해 유전질환 신약개발기업인 펄크럼 테라퓨틱스에 지분투자를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회사의 잠재력을 발견한 사노피는 최근 펄크럼 테라퓨틱스의 신약후보물질을 10억5500만달러(1조4000억원)에 도입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차바이오그룹의 '솔리더스인베스트먼트', 대웅제약의 '대웅인베스트먼트' 등 제약업체가 벤처캐피탈을 운영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셀트리온의 경우는 미래에셋그룹과 바이오벤처펀드를 조성해 영국계 ADC(항체약물접합체) 기업인 익수다테라퓨틱스에 투자해 최대주주에 올라서기도 했습니다. 현재 서진석 셀트리온 의장이 익수다 테라퓨틱스의 이사회에 참여하며 신약개발 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투자수익을 실현한 사례도 있습니다. 유한양행은 지난 2020년과 2021년 에이프릴바이오에 총 130억원의 지분투자를 단행했는데요. 최근 공동개발 협력관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지난 19일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221억원의 차익을 거뒀습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연구개발만 하는 바이오벤처 단계를 넘어선 다음에는 안정적이면서도 과감한 투자로 지속가능한 사업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국내 제약사들이 투자에 인색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각자 사이즈에 맞게 최대한의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