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Deny)', '진술(Depose)', '방어(Defend)'
현지시각 지난 4일 새벽 미국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 미국 최대 민간보험사인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최고경영자(CEO)가 피격당한 현장에는 이같은 문구가 새겨진 탄피 3개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 보험사들이 보험금 청구를 거절할 때 주로 쓰는 표현입니다.
얼마 뒤 총격을 가한 26살 청년이 체포되자 'X(엑스)'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는 그를 옹호하는 게시글이 쇄도했습니다. 그의 범행동기가 보험업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보험금 지급, 5번 중 1번 거절
비영리 의료연구단체 KFF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미국 보험사의 지급 거절률은 평균 약 20%로 조사됐습니다. 보험사마다 이 비율은 달랐는데 한 조사에서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2022년 거절률은 32%로 전체 보험사 중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공공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노인과 저소득층 등으로 한정적입니다. 민간보험사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에 의료보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지난 2010년 오바마케어가 도입됐는데요. 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완화한 것이 골자입니다. 하지만 수익성이 떨어진 민간보험사들은 사전승인제도 등을 통해 보험금 지급을 제한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결과 의료서비스로부터 소외되는 미국인이 이전보다 더 늘어났습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 조사에서 지난 2022년 미국인 10명 중 4명이 값비싼 의료비용 때문에 의료서비스를 받는 것을 미룬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요. 이는 갤럽이 조사를 시작한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죠.
美 의회, 제도개선 나섰다
미 의회는 총격 사건이 일어난지 열흘 뒤 민간보험사가 PBM(처방약급여관리업체) 사업을 운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초당적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번 피격 사건이 미국 의료시스템에 대한 단순한 성찰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진 첫 번째 사례입니다.
양당(공화당·민주당)이 해당 법안을 추진한 이유는 보험사가 자신들을 대신해 제약사와 약가를 협상하는 PBM을 소유하면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환자들의 의료비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상 보험사는 PBM을 통해 약가를 낮추는 게 보험금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유리합니다. 이를 통해 보험료 상승도 억제할 수 있죠. 하지만 약가를 낮추면 PBM의 이익이 줄어듭니다. PBM의 수익구조가 약가의 일정 비율을 리베이트로 받는 것으로 짜여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유나이티드헬스그룹, 시그나와 같은 보험사는 옵텀, 익스프레스 스크립츠 등 초대형 PBM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옵텀과 익스프레스 스크립츠는 저가의 인슐린 약품을 처방집 목록에서 부당하게 제외한 혐의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로부터 제소당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 제약사 영향은
제약업계는 보험사 못지 않게 의료비 부담을 키운 주범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은데요. 연구개발(R&D) 비용을 부풀리거나 특허보호제도를 남용해 높은 약가를 유지하는 관행이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8월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공공보험인 메디케어에서 보장하는 약물 10개의 약가를 인하하는 조치에 나섭니다. 메디케어 60년 역사상 처음 이뤄진 손질로 업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번 피격 사건 이후 이같은 변화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국시장에 진출했거나, 진출하려는 국내 제약사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셀트리온 등 대형 제약사는 PBM과 협상을 통해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있는데요. 만약 대형 PBM과 보험사간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이뤄지면 의약품 가격정책에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간 대형 PBM과 협상에서 소외됐던 소규모 제약사들이 미국에 진출할 기회가 넓어질 수도 있죠.
바이오시밀러(생물의약품 복제약)를 취급하는 제약사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이오시밀러는 오리지널 의약품보다 가격은 저렴한데 효능이나 안전성은 비슷해 의료비 경감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헌제 신약개발연구조합 연구개발진흥본부장(전무)은 "PBM 제도가 쉽게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바이오시밀러의 경우 차기 행정부에서도 미국 국민들의 보건 향상 차원에서 우호적인 정책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