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초 미국에서 특이한 질병이 발견됐다.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한 남성 동성애자에게서 거대세포바이러스 감염, 구강 칸디다증, 주폐포자충 폐렴 등 면역력이 저하됐을 때 생기는 질병들이 잇따라 나타난 것이다.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인 '에이즈' 발견이 최초로 공식화된 사례다. 과거 치료제가 없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로 사망했다. 해외 유명 스타 중 에이즈로 사망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 영화배우 록 허드슨, 영국 록 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 등이 있다.
에이즈는 인간면역결핍(HIV) 바이러스가 증식해 사람의 몸에서 면역을 담당하는 백혈구를 파괴해 여러 감염병에 취약해지고 다양한 합병증을 불러일으킨다. 면역력이 강할 때는 자체적으로 감염이나 염증반응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수 있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가벼운 질병으로도 사망할 수 있다.
에이즈는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 사망률이 매우 높아 '죽음의 병'으로 불렸지만 1987년 항바이러스제인 '지도부딘'이 개발되면서 장기간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도부딘이 처음부터 에이즈 치료제로 개발된 건 아니다. 원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암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1964년 만들어진 화합물이었다. 지도부딘을 만든 미국 과학자인 제롬 호르위츠(Jerome Horwitz) 박사는 DNA 복제를 억제해 암세포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초기 개발단계인 동물실험에서 암 치료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지도부딘은 긴 세월 동안 실험실 냉동고에 묻힌 신세로 전락했다. 지도부딘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건 프랑스의 파스퇴르연구소 연구팀이 1983년 에이즈의 원인이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다.
HIV 발견 후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도 개발에 뛰어들었다. GSK는 세포 연구에서 지도부딘이 HIV 활성을 억제하는 효과를 확인하면서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당시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워낙 컸기 때문에 전임상 단계인 동물실험을 뛰어넘어 환자 대상 임상으로 바로 돌입할 수 있었다.
GSK가 에이즈 환자 282명을 대상으로 24주에 걸쳐 지도부딘과 위약을 투약한 결과 위약군에서는 19명 환자가 사망한 반면 지도부딘 복용한 환자는 단 1명의 사망자만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도부딘 복용 환자에서 면역성이 회복되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속하게 승인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임상단계에 6~10년이 걸리지만 지도부딘이 임상부터 FDA 승인까지 걸린 기간은 25개월에 불과했다.
항암제 개발에 실패하며 묻힐 뻔한 화합물이 최초이자 혁신적인 에이즈 치료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에이즈 치료제는 지도부딘 개발 이후로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재는 내성, 돌연변이 등에도 사용가능한 에이즈 치료제들이 다수 개발됐다.
다만 현존하는 에이즈 치료제는 매일 복용하며 관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 차세대 에이즈 치료제 개발도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카이노스메드와 에스티팜 등이 부작용이 적고 투약 편의성을 높인 차세대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