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은 임성기 회장이 1973년 설립한 한미약품공업으로 시작했다. 임 회장은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27살의 나이에 서울 종로에서 '임성기약국'을 개업했는데 이때 모은 자본으로 회사를 차렸다.
이름과 달리 한미 합작사는 아니다. 오해를 없애려고 1981년 상호를 '韓美藥品工業'에서 '한미藥品工業'으로 바꾸기도 했다. 1988년 기업공개를 거쳐 2003년 상호를 한미약품으로 변경했다. 초기엔 제네릭(복제약) 위주였으나 2000년대 들어 신약개발에 집중하면서 국내 제약사 가운데 돋보이는 연구개발(R&D) 성과를 내고 있다.
2009년 고혈압치료제 아모잘탄이 개량신약 1호로 허가받았고, 2013년 역류성식도염 치료제 에소메졸은 국내 개량신약 중 가장 먼저 미국 시판허가를 획득했다. 개량신약은 이미 허가받은 의약품보다 안전성·유효성·유용성 측면에서 진일보했다고 평가받는 의약품이다.
2015년에는 글로벌제약사 사노피와 39억 유로(약 4조8000억원) 규모의 당뇨치료제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하는 등 한 해에만 5건, 총액 7조원이 넘는 기술 수출로 주목받았다. 이후 일부 계약의 해지·축소 과정에서 늑장공시 의혹이 불거지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제약사가 만든 의약품이 다국적 제약사들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는 이른바 '산업적 도약기'의 선두에 한미약품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한미약품의 역사와 달리 승계 문제는 더디다. 40대에 접어든 2세들이 주요 계열사 요직에 자리 잡고 있지만 여전히 '2세 경영'란 수식어조차 완벽하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지분 승계는 갈 길이 더 멀다.
# 여전히 건재한 창업주 임성기 회장
임성기 회장의 자녀 세 명은 현재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와 주력 계열사 한미약품에 재직 중이다.
장남 임종윤(46) 사장은 보스턴대 생화학과, 버클리음대를 졸업하고 2000년 한미약품 전략팀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한미약품 북경법인의 기획실장과 부총경리(부사장), 총경리(사장)를 거쳐 2009년 한미약품 사장에 올랐다. 2010년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 출범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고, 2016년에는 임성기 회장의 등기임원 임기 만료로 단독 대표이사가 됐다.
장녀 임주현(44) 부사장, 차남 임종훈(41) 부사장은 2007년 한미약품에 입사했다. 미국 스미스칼리지 음악과를 졸업한 임주현 부사장은 한미약품에서 인적자원개발(HRD) 업무를 담당했고 지금은 글로벌전략 업무도 맡고 있다. 미국 벤틀리대 경영학과를 나온 임종훈 부사장은 정보관리총괄(CIO)을 담당한다.
임성기 회장의 자녀들이 핵심회사의 사장, 부사장 직함을 맡는 구도는 2세 경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으로는 볼 수 있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로 표현하기엔 이르다.
임 회장은 현재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의 회장을 맡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인 명예회장이 아니라 회사로 출근하면서 업무를 보는 상근 회장이다. 2016년 한미사이언스의 등기임원 임기가 끝난 후 스스로 연임을 포기하면서 미등기 신분이긴 하지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볼 수는 없다.
주요 제약사 가운데 임 회장보다 연배가 높으면서 상근 회장으로 재직 중인 경우는 김승호(86) 보령제약 회장, 윤원영(80) 일동홀딩스(일동제약 지주회사) 회장 정도다. 다만 보령제약은 이미 2세로 지분 승계를 마무리했고, 일동제약은 지분 승계가 미완성이긴 하나 비상장회사(씨엠제이씨)를 통해 확실한 승계 기반을 확보했다.
한미약품은 상황이 다르다. 직위 승계는 물론이고 지분 승계도 더디다.
# 지주회사 전환 혜택 못 누린 2세
한미약품은 2010년 인적분할 방식으로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인적분할 방식의 지주회사 전환은 분할 후 총수 일가들이 자회사 주식을 지주회사에 현물출자해 단숨에 지분율을 높일 수 있는 구조다. 돈을 들이지 않고 지배력을 높일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다.
이 때문에 제약사를 비롯한 많은 기업이 지주회사 전환을 지분승계 문제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로 사용했다. 다만 지주회사 전환으로 지분 승계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인적분할 전에 최대한 많은 지분을 이전해놔야 한다. 그래야 지렛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임성기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적분할 직전인 2010년 초 한미약품 지분율은 임 회장이 19.6%인 반면 2세 3명은 각각 1.1%에 불과했다. 한미약품 최대주주 지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1998년 당시 지분율(임성기 21.75%, 2세 각 1.09%)과 큰 변화가 없는 수준이다. 자녀들이 20~30대를 거치는 동안 2세 지분 승계가 없었다는 얘기다.
임 회장이 지주회사 전환 전 2세에게 물려준 지분은 2008년 각각 0.29%씩 증여한 것이 전부다. 이 때문에 한미약품이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지분 증폭 효과는 임성기 회장에게 집중됐고 자녀들은 별다른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지주회사 전·후 지분율은 임 회장이 19.64%(한미약품)에서 45.45%(한미사이언스)로, 2세들은 각각 1.15%에서 2.65%로 늘어났다. 증가 폭은 같지만 자녀들의 경우 지주회사 전환 전 지분이 적었던 만큼 손에 쥘 수 있는 지분도 적었다.
지주회사 전환 후에도 임 회장은 자녀(2세)보다 손자(3세)들에게 지분을 더 많이 물려주면서 화제를 모았다.
임 회장은 지주회사 전환을 마친 2012년 8월 자신의 한미사이언스 지분 가운데 731만3000주를 직계 가족들에게 증여했는데 세대별 배분 내역이 흥미롭다. 2세 5명(배우자 포함)에겐 221만800주를 물려준 반면 3세인 손자 7명에게는 436만230주를 물려줬다.
결과적으로 현재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의 지분 구성을 보면 임성기 회장이 34.25%를 가지고 있고, 2세들은 여전히 한 자릿수(임종윤 3.60% 임주현 3.54% 임종훈 3.14%)에 그치고 있다.
세대별로 나눠보면 ▲1세(임성기 회장과 부인) 35.51% ▲2세 12.5%(배우자 포함) ▲3세 7.38% 등이다. 창업자 세대가 압도적 지분을 보유한 가운데 경영 참여 중인 2세와 미성년자 3세 지분율이 큰 차이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 2세 우회 지분승계 통로 한미헬스케어
한미약품의 더딘 2세 승계 과정에서 그나마 한미헬스케어의 존재감은 주목받는다. 한미헬스케어는 2세가 지분 97.7%(임종윤 35.86% 임주현 24.18% 임종훈 37.63%)를 가지고 있다. 대표이사는 임종훈 부사장이며, 형 임종윤 사장, 누나 임주현 부사장도 한미헬스케어 이사진이다. 2세 삼 남매가 모두 등기임원에 이름 올리고 있다.
한미헬스케어는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 지분 6.42%를 보유하고 있다. 지주회사 위에 또 다른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2세 개인회사가 있는 셈이다.
한미헬스케어는 시스템 통합업체인 한미IT와 의료기기업체 한미메디케어가 지난해 합병하면서 탄생했는데 합병 전 이미 2세 중심으로 지분 구조가 갖춰져 있었다. 합병 전 한미IT는 2세가 지분 100%(임종훈 36% 주현 21% 종훈 36% 자사주 9%)를 가지고 있었고, 한미메디케어는 한미IT가 지분 82.5%를 확보하고 있었다.
2세→한미IT→한미메디케어로 이어지는 구도가 처음부터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애초 한미메디케어는 한미사이언스(당시 한미약품)의 자회사였으나 2008년 한미사이언스가 메디케어 지분을 모두 팔고, 메디케어가 자사주를 한미IT에 매각하면서 2세→한미IT→한미메디케어 구도가 완성됐다. 2세 승계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볼 수 있다.
2세 회사인 한미IT는 계열사와 거래로 매출을 올리면서 덩치를 키워왔다. 합병 직전 2016년 한미IT는 연결재무제표 기준 매출의 49.9%가 한미약품 등 계열사와 거래에서 발생했다. 2세들이 지분을 가진 비상장회사가 계열사 일감에 힘입어 성장하고, 주력회사 지분을 보유하는 전형적인 우회 승계 흐름이다.
다만 한미헬스케어가 가진 한미사이언스 지분(6.42%)은 아직 임성기 회장 지분(34.25%)에 한참 못 미친다. 한미와 유사한 승계 구도를 보이는 일동제약의 경우 3세 윤웅섭 대표의 개인회사 씨엠제이씨의 지주회사 지분율(16.9%)이 2세 윤원영 회장(14.8%)보다 앞선다.
따라서 앞으로 임성기 회장도 2세 지분 승계를 본격화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점진적으로 한미헬스케어에 매각하는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하면 자녀들은 증여세 부담을 줄이면서 한미헬스케어를 통해 지주회사를 간접 지배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임 회장은 지난해 1월과 5월에도 각각 17만 주(0.29%), 16만 주(0.26%)를 한미헬스케어(합병 전 한미메디케어)에 매각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한미약품은 78세의 창업자인 임성기 회장이 여전히 압도적인 1대 주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2세 자녀 세 명과 승계의 통로 역할을 할 한미헬스케어 지분율은 여기에 한참 못 미치는 만큼 아직 지분 승계가 본격화했다고 보긴 이르다.
2세 승계 구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아직 10대에 불과한 3세 지분 승계는 어느 제약사보다 활발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임성기 회장이 2세 승계에 속도를 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직은 급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창업자의 시선에선 2세 자녀들이 못 미더운 탓일까. 지금까진 더딘 걸음인 한미약품의 2~3세 승계 작업이 언제부터 속도를 낼지 주목된다.